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
2020.04.14 말씀묵상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28-35)
눈이 가리워진 두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사모하는 마음에 함께 더 머무르기를
간청했고 예수님은 이에 흔쾌히 수락하셨다.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있는 것 같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예수님은 예수님을 간절히 목말라하는 이의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긍휼히 여겨주신다. 그리고 친히 만나주신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예배드리기를
즐거이해야하는 이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으로 인함이나, 그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인함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의 소원을 알고계시고
그것을 친히 이루시는 것이다.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간절히 구했다. 나로서는 주님을 섬길수 없고
주님이 맡겨주신 이웃영혼들을 책임질 수 도 없다는 것을 알고있으니,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것을 맡아낼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이 생겨나도록. 그렇게 바라며 말씀을 읽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기도가 이루어졌다. 허나 그것이 내 기도의 응답인지 알기까지 꽤나 어려웠다.
어제 나는 이상하도록 마음이 짓눌리고 쉽게 화내고 감정기복이 왔다갔다 했다.
지금 나는 연애를 시작한지 한달 좀 안되었다. 연애만 시작하면 나는 감정기복이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들면 감정선이 굉장히 예민해지고
쉽게 의미부여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이런 기복이 반복된다. 상대방이 어떠느냐 보다도 스스로의 감정이 제어가
잘 안되어서 너무 힘들다. 특히 이번에는 더 심했다. 사소한 일에 화가나고 그런 내 모습이 기대와 달라 부끄럽고
창피해서 하루종일 괴로웠다. 왜 나는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는걸까? 자책하는 마음이 땅굴을 팠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답답해서 뛰쳐나가 10키로를 내달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침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아 정말로 나는 답이없는 존재다. 스스로 그렇게 예민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한편, 스스로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데 그게 참 힘들다는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이 없이는 살 수 없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사람을 온전히 이타적인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자책하다가, 마음이 좀 진정되고나서 다시 내 마음이 왜그러했는가를 들여다 보았다.
기대를 하는 것은 상처를 감수하는 마음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활짝 그에게
열었다는 뜻이고, 그 사람에게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굳이 부여한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는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들 때문이다.
내 스스로 감정변덕을 못이겨 잔뜩 예민해지고 화가 많아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그런 과정들이 싫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영향이 내가 믿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게될까봐 염려된다. 그런 상황들이 싫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어도 친구 이상으로 마음을 많이 주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마음을 준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마음을 여는 일은 참 어렵다.
특히나 몇 번 진실된 마음을 주고 상처를 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복어처럼 가시를 세우고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누나 생각이 났다. 어떻게든 상처받으려고 매섭게 노려보는 눈.
상대방이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하나 주의깊게 보면서 의미부여하고, 그걸 통해 또 상처받고. 아무도 의도하지않은 말들에
계속해서 낱말들을 붙여 새로운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그런 것을 망상이라고 부르고 나는 하나도 공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피곤하고 괴롭고 힘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자기를 위해하려고 그랬다면서
도와주려고하는 사람에게 날을 세우는 것이 짜증났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엔 냉소적인 태도로 까지 바뀌게 되었다.
내가 직접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상대방의 행동과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방어기제를 내세워보니까 조금 알게되었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안쓰러운 마음이다. 사랑받기를 애원하고 외롭고 싶지않고 상처를 치유받고싶고 누군가 자신을
보듬어주길 바라는 애처로운 태도다. 그런 잔뜩 움츠러들고 취약한 마음에 가장 좋지않은 반응은. 무관심 내지 냉소, 무시다.
심하게는 그것이 혐오로까지 번진다.
피곤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표현들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늘어지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듯이 비판하고.
도와주려는 나의 마음은 보지않고 원망하고. 상처받았다며 자꾸만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는 상대방이. 피곤하고 괴로울 수 있다.
싫을 수 있다. 사람에게는 의지력에 한계가 있다. 아무리 아끼는 사람이라도. 무한히 상대방의 주관적인 감정의요구를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본다. 그 영혼이 간절히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를 본다.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리고 상처난 영혼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향할때에 예수님에게 내가 원하고 바라고 부르짖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떠올린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기억한다.
먼저는 회개한다.
내가 그동안 누나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품었고 그리고 그게 어떤태도로 번져나와 아픈 마음과 몸을 가진 누나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무관심하고 냉소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마음까지 들었었고 그런 것들을 기반한 마음이 나의 태도를 만들었고 나의 말과 행동을 만들었었다.
아픈사람을 앞두고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음에도 그게 되지 않았고. 그런 것들이 삐져나올때마다 무척 상처받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의 큰그림을 이해하게 되고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하고는 영혼의 굶주림과 결핍, 그 상한마음을 쉽게 긍휼할 수 없다.
예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나를 그런 존재로 빚어가기 전 까지는. 나는 그저 사모하고 바랄 뿐이다.
끊임없이 주님을 초청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한계를 넘어서 나를 인도하셨다.
다만 지금은 기도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누나한테 잘하고 싶고 누나한테 사과하고도 싶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내 경험을 통해 무엇이 긍휼받아 마땅한 성도의 영혼인지 깨달았지만 깨닫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신앙이 아니기에.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구한다. 그리고 조금씩 실행한다. 누나의 매일 같이 쌓여가는 자기 한탄과 터무니없는
오해를 부풀리는 핸드폰 메세지들을 못 본체 했었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다시 매듭지어야 될지도 모르겠고.
(“누나가 생각하는 그거 오해하는 것이다” 라는 일체의 반박은 허용하지 않으니까, 그저 동조해주길 바라는 요구 앞에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거라는 가능성 조차, 내 마음에 긍정적인 불씨조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주님이 다시 앞길로 나를 인도하시길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나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또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누나라는 거대한 마음의 산을 넘어서 또 많은 영혼들을 마주하는 삶을 산다. 결국엔 같은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묻는 물음에 자신있게 만난 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보통 오컬트를 생각하듯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게 어떻게 보이느냐, 주로 물리적인 세계에 관한 질문들을 한다.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확신한 순간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고 그분의 생김새를 요목조목 확인했던 그런 종류의 시간이 아니다.
나를 만나주신 주님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져주셨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성경에 관해 풀어주시는 그 과정 속에서 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듯이.
나는 말씀을 들으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고 마음이 뜨거워졌었다.
지친심령을 일으켜 세워서 어떤 물적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몇 년을 주님을 위해 일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그 사역은 월에 500만원을 갖다준다고 해도 도무지 쉽게 할 수있는 사역이 아니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노미 상태에 빠졌는데도 그걸 견뎌내는 동기부여가 때때로 흘러넘쳤고, 더 큰 에너지로 영혼들을 돌보았었다.
사실 직접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부족한 점이 무지 많았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성령이 마음에 임재하고 나를 가르치시는 것은 깨달을 수 있다.
나는 또다시 예수그리스도를 내 삶으로 초청하기 위해, 그분이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고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길. 내 눈을 열어 빛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