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분한 사랑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는 당신에게
2020.04.15 말씀묵상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24:36-43)
예수님이 돌아가시고나서, 시체가 사라졌고 다시 모인제자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몇몇 사람은 그를 목격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갑자기 예수님이 그 자리에 등장하신다.
사람들은 다 놀라자빠진다. 이게 도대체 무슨일인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게 생시인가. 육신인가. 영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일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두려워 하느냐. 왜 마음에 의심이 드느냐.
나를 만져보아라. 내가 육신으로 살아있다. 의심하지마라.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겪는 현실적인 경험들의 누적과 총집합이
만들어낸 나의 주관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험이다.
현실은 그리 이상적이고 아름답지 않다. 육체가 존재하는 이 곳은 늘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된다. 상처가 있고 치유가 있으며, 기쁨과 환희의 빛이 밝을 수록, 슬픔과 우울의 그늘도 짙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에서 어긋난 죄의 비탈에 빠진 인간의 운명이자, 현실의 구성원리다.
나는 자존감이 그리 높지않았던 것 같다.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던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나의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생긴 상처로 마음이 얼룩지고 피로하여 무릎이 땅에 닿을 때.
그 때 쯤 이었던 것 같다. 집단의 인간들이 맺은 계약, 그 사회속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이 깎이고 낮아지며, 그로인해 스스로를 감춘다.
신뢰하는 감정과 사랑보다는 일반적으로 쓸모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들을 받았다.
스스로는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자기 확신은 터무니 없이 약하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그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면 자신을 채우던 수십 가지의 가치의 근거가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사람의 주관이라는 게 그렇게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주관과 사회의 객관사이에 연결다리가 되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 삶이라.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사회구조, 수많은 인간들이 점 찍히듯 찍혀 만들어진
그 사회구조의 중간 허리 밑 어디쯤에,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나 라는 인간을
그 존재 자체만으로 너무나도 사랑하여서 자기 목숨을 대신 희생했다는 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않은 것이다.
친히 등장하신 예수님,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런 당혹감을 준다.
마더테레사가 나에게, 넬슨만델라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말 만큼 비현실적이게 들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쩌면 커다란 경험데이터의 축적이자 집합체다. 누적된 프레임을 벗어나기가 쉽지않다.
예수님이 분명 사역하실 때에, 인자가 고난을 받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활하신 그날, 시체가 없어진 그날
우리 주님이 육체로 다시 부활하셨구나 단박에 믿을 수 있던 인간이 과연있었을까.
그러니까 지금 돌연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 앞에 모든 이들이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부족함 조차, 이해하시는 예수님이다.
애초에 그런 체휼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었다면 십자가를 지고 핏방울 하나 하나 흘릴 수 가 없을것이다.
당혹스러워 하는 나를 향해 예수님이 말 없이 행동으로 보이시는 것들은 무엇이었나.
못박혔던 손과 발의 자국 을 보여주셨다. 구운 생선을 잡수셨다.
끝까지 부족한 나의 믿음과 육신의 눈 앞에서
거룩하고 부족함 없으신 그 주님이 완전하신 신의 형상과 모습이 아닌
평범하기 그지 없는 육체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깊은 사랑은 나를 내려놓고 사랑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헌신하고 헌신한다. 표현하고 또 표현한다. 배려하고 또 배려한다.
감정기복이 잦고 화가 많은 요즘이다. 그래서 심령이 지치고 피곤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가족관계에서 화가 난다. 이런 나 자신의 약함과 악함에 지쳐서
아무도 없는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었다. 기도하지 않고는 이 악한 나의 모습을
도저히 견딜 수 가 없었다. 주님을 불렀다. 나를 도와달라고. 나의 마음을 만져달라고.
나에게 죄를 깨닫는 심령과 나의 영을 새롭게 회복 시키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주님을 찾았다.
속에서부터 영혼의 벅찬 감동이 조금씩 차오르는 듯 했다.
아껴두고 영이 죽고 말라 지칠 때 마다 꺼내보는 영상을 3개 찾았다. 하나 씩 차례대로 보았다.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죽은 영의 감각을 살려냈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했고 서러웠는지
영혼이 그렇게나 아팠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음성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메아리 치는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내가 그 감동을 회복하는 날에는
모든 이들에게, 이 영혼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미친다.
그저 사랑한다는 진부한 이야기,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되고, 나의 주님이 되기까지
그 무수하고 험한 죄의 장벽들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는 그렇게 나에게 온다.
더 사랑하고싶다.
나의 이웃들을, 나의 가족들을, 나의 연인을, 맡겨주신 소중한 사람들을.
궁극적으로는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