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주님께 “돌아가는” 신앙이라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by Daniel Josh


2020.04.28 말씀묵상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40:12-31)

가끔보다보면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는 이 행위가
사상누각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것 말이다. 이론상으로 그렇게 오해할 여지가 있다.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회개를 한다. 지난 자기 삶의 죄와 과오를 주님앞에 드리고 뉘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이것을 주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원점으로 돌아간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삶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우린 연약하기에 어쩌면 또 죄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무림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일반인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하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무림의 비급을 전수받는 그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나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그렇지는 않은가? 그런 의문이 들었었다. 왜 예수님을 만나고나서 나는 변화되지 않는가? 왜 죄를 덜 짓게되거나 승천하지 않는가? 왜 매일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서도 죄를 그대로 지어 희망고문을 당하는 건가?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서 산중에 들어가 어떤 욕심도 번뇌도 느끼지않고 스스로를 세상과 차단하는 삶도 허락되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것 일까?

인생에서 무엇이 되었든, 특정한 어떤 과정속에서 [성장한다]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 인지체계는 지루한 반복과 색다른 경험 그 사이 균형점에서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은 그 균형점이 계속해서 누적되면서 앞으로 혹은 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운동을 예로 들면 스쿼트를 10개만해도 지치던 사람이 꾸준히 매일 연습을 했더니 20개, 30개 심지어 무게를 들고서도 운동을 할 수 있는 경지가 되는 발전을 맛보았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늘 있던 그 자리에서 마냥 서있는게 아니라 더 낫고 좋은 과정으로 옮겨가는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이 변화에서 희열을 맛본다.

신앙에도 [성장한다]라는 개념이 존재할까?
왜 사람들이 유독 신앙에 있어서 만큼은 어려움을
느낀다고 생각이 될까. 나를 포함해서.
신앙은 좀처럼 ‘성장하고있다.’,‘확실히 이전보다 나아지고있다’ 라는 느낌을 받는게 유독 어렵다.
신앙이 좀처럼 성장하고있다,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다 라고 생각되는 그 지점에서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에서 흔히 언급되는 표현들을 살펴보면 그렇다. 주님께로 ‘돌아간다’ 라거나 첫사랑을 ‘회복한다’라거나.

앞으로 나아가고있다 라며 뿌듯한 마음을 느낄 무렵 즈음이 되서 다시금 자기 죄와 어둠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왜 신앙이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관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의 수치와 죄악이 더 짙게 드러나는 것 일까. 이 시점에서 그런 의문이 들어 의욕이 떨어지게 되는 경우도 더러있는 것 같다.
신앙은 축적되지 않는구나. 믿음의 거인이라고 생각되던 선배들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짓고 넘어지는 것들을 본다. 내가 믿어왔던 것들에 심각한 균열이 생긴다.

말씀의 본문처럼, 하나님의 세계와 영적원리는 인간의 작은 머리로 감히 해석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매일 마다 읽는 이유가 있다면. 상식적이고,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죄악어린 사고방식, 알량한 사고방식이 해로운 포화지방처럼 분포되어있는데 이것들을 매일마다 깨끗이 털어내기 위함인 것 같다. 신앙은 청소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를 늘 잊지않고 나의 정체성과 나의 주인을 계속해서 기억해내는 것. 일상과 세속에 함몰되지 않는 것. 많은 죄악이 치아에 번식하는 세균처럼 시나브로 나를 덮어올때, 그 어둠으로 인해 주님의 빛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기 전에 그분을 찾는것. 지방을 걷어내고 밝은 빛에 속해 익숙해지는 훈련으로 근육을 길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 주님 앞에 드리는 내 사랑의 표현이며, 주님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그분의 통치가 임하도록 성령을 나에게 허락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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