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파괴할 수 없는 존재
20200502 말씀묵상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43:1-2)
두려워 하지 말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자꾸만 두렵다. 남들의 소식이, 세상의 이야기들이. 지금이나 성경이 쓰여진 구약의 때나 똑같은 것 같다. 결국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금 나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렇다. 더 많은 것들을 가져야만 해소될 것 같은 이 불안함.
세상이 인정하는 어떤 외적 성공을 거두어야할것만 같은 초조함.
멀리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면 자극이 되거나 아무 느낌이 없거나 축하해주고 싶거나 비아냥대고 싶다. 꽤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불안하다. 초조하다.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내가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고 얼굴을 알고, 대화를 나눠 본 누군가가 앞으로의 좋은 계획들을 가지고 많은 돈을 벌고 많은 명예들을 추구하며 또 창의적이고 좋은 생각들을 현실로 발휘해내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내가 너무 안일하게 뒤쳐져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괴롭다.
그들과 나를 비교해봤자 얻어지는건 비참함 과 교만함 뿐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좋지 않다는 걸 안다. 사람은 모두 제각기 다른환경에서 자란다. 삶의 가치관이나, 생각이나, 행동양식이 모두 너무 다르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는 한줄기의 강으로 흐른다. 그래서 갑과 을이라는 질서가 생기고, 그것이 직접적인 이익이나 피해가 되어 각자에게 돌아간다.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고 세속적이게 된다. 삶을 살면서 우리가 꿈꾸는 최초의 이상은 결코 비참하지 않다. 사람은 선하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으며, 돈으로 결코 행복을 살 수 없다. 인격적 훌륭함을 추구하고 좋은 생각을 빚어내는 즐거움 속에서 삶의 만족감이 풍부해진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꿈. 정말 괜찮은 인생인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아직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있다. 고통이 있고, 이기심이 있다. 그 속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낯뜨거움과 구역질나는 모습들이 있다. 같은 세계에 사는데 너무 천차만별의 모습들이 있다. 최고의 행복을 기대하며 추구하고 사는 것 보다, 최악의 불행으로 부터 자기와 자기주변을 지키고자 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 그게 맞다.
생각을 계속해서 하다보면, 그리고 더 많은 양질의 정보를 접할수록, 인생이 불안하게만 느껴진다. 지금 내가 결코 게으르게 살고있는 게 아닌데도,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불안하게 만든다. 지금 누리고있는 선물같은 현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디지털문명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각들도 따라가긴 벅차지만 그래도 조금씩 의식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을 처리하기에 피로를 느낀 정신건강을 보호하려고 말이다. 비교하지말자. 자기자신을 찾자.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알자. 천천히 가자. 실수해도 돌아가도 괜찮다. 망하는 것이 진짜 망하는 것이 아니다. 안죽는다. 괜찮다. 힐링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 달려나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윽고 표면적 계급이 사라진 이시대에, 계급은 없지만 가치는 매겨지게 된다. 가치에 따라 사람의 형편이 하늘과 땅차이가 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감당하지 못할 걱정을 하느라 지금을 낭비하고 소진하면 안되겠지만. 이 순간의 고통완화를 생각하느라 오지않은 가까운 미래에는, 더욱 어려운 형편에 우리가 살게될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너무 많다고? 결코 나만 이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시대가 주는 아이러니와 머릿속에 한번쯤 드는 생각들을 조금은 세세하게 풀어서 나열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함속에서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스스로가 무가치한 존재가 될수도 있다 라는 두려움이 들기가 너무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하라리는 가까운 미래에 무용계급(쓸모가 없는 사람들)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런 세상에 소속감을 갖고 살기란 정말 부담스럽고 괴롭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종교의 존재이유는 정신승리 때문이라고. 일부분 그것이 맞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은 어느정도 정신승리가 없으면 미쳐버릴 것이다. 정신승리를 다르게 말하면 의미부여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백지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물질 그 이상을 살고있고, 허구를 물질화 시킬수도 있으니까. (돈이나 국가가 그렇다_유발하라리의 말이다) 종교는 정신승리 일수 있다. 신앙은 정신승리가 아니다. 정신승리는, 현실의 위치에서 이상화된 생각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신앙은, 현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구성된 허구인 것을 깨닫는 일이다. 그러나 공기를 눈으로 볼 수 없듯, 이 세계의 본질은 쉽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오감으로 지각하는 이 세상을 지속적으로 살다보면 자꾸만 잊는다. 허구에 속는다. 나의 가치를 잊어버린다. 건전한 자기개발서 혹은 위로에세이 처럼 나의 가치를 믿어주자는 말을 하고싶은게 아니라, 가변하는 것들은 세계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내가 망할까 봐? 내가 돈을 벌지 못하게 될까 봐? 나의 곁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가게 될까 봐? 내 평판이 지금보다 더욱 형편없이 추락하게 될까 봐?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세상은 변한다. 우리가 사는 매일의 풍경도 그렇게 흘러 변한다. 가변하는 것들은 우리를 파괴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가진 지금 이 육체도 나를 파괴할 수 없다. 나는 존재 그 이상을 사는 사람이고, 영혼이다.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이가 나를 그렇게 택하셨다. 나의 하나님만이 나를 파괴할 수 있다. 나를 통치할 수 있으며, 나의 삶에 의미를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뒷말이 퍼져도, 나의 시도는 이순신 장군 처럼 확실한 승리를 계산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에 괜찮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진리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나와 함께하고 있는, 2000년의 세월과 대륙및 바다를 넘어온 이 복음, 아니 창조의 때 바다와 육지가 있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이 음성은 영원하다. 영원한 것이 내 옆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불이 나를 사를까 두려운가. 물이 나를 삼킬까 두려운가. 칼이 나를 해칠까 두려운가.
두려움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