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묻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2020.07.05 말씀묵상
[왕하3:2-3]
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내 신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나는 주님이 보시기에 기쁜 사람일까?
여호람에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다. 그가 그의 아버지와 형과 같이 악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대체의 평가는 바뀌지 않는다. 여러보암이 행했던 죄, 그것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일이었는데 그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목표를 이루고자 할때 하는 착각이 있다. 그것은 기준설정의 잘못에서 오는 착각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벌고자 한다면, 그 사업의 가치는 본인이 매겨서는 안된다. 돈을 벌고자하는 목적이라면 그 돈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자신이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사업이라서 자기 돈으로 굴려내는 사업이라면 상관없지만, 소비자에게서 돈을 받고 굴려내는 사업이라면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된 사업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자기 기준에서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설정해본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인가? 내 신앙에 지속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이유, 나의 삶에 지속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나의 기준설정의 잘못은 아닐까? 나는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근본적인 초점이 어긋나있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을 한다고 사람은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흉내를 내고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에 빠질때 즈음 생각이 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다윗이다. 그의 삶을 생각해본다. 그는 성경에 통틀어 몇안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강간과 살인까지 저지른 인물인데. 어떻게 하나님에게는 그 죄가 가림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사실 진리는 말한다. 죄악에서 자유할 수 있는 인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하는 것은 객관적인 죄악으로부터 나를 차단하고 나를 더 막연하지만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죄사이에는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강한 인력이 작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않다. 죄에 굴복하거나 죄를 초월한 존재에게 굴복하거나. 후자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같은 잘못을 해도 선생님께 이해와 용서를 받는 아이가 있는 반면, 더 많이 혼나는 아이도 있다. 어렸을 적나는 형평의 문제로 이런 상황들에 접근했다. 의문이 들었다. 왜 선생님은 공정하게 같은 잘못에 같은 반응을 보이지않고 주관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걸까? 시간이 지나고나서 나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감정일반을 가지고 더불어 사는 인간사회 속에서는 인간관계만 존재할 뿐, 완전한 형평과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떨까. 그분은 정의로우신 분이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보면 그분은 정의롭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다윗과 같은 자는 구원을 받고 세종대왕같은 분은 구원받지 못하는 걸까?
인간은 세계와 신에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 기원을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다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인격적 존재이다. 많은 돈을 벌고 많은 업적을 이뤄도 진실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얻는 기쁨이 가장 큰 그런 존재다.
나를 창조한 하나님도 그렇다. 그분은 분명 공의로운 분이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 사이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다윗과 여호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우리가 쫓아가야될 모델에 대한 힌트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태도라고 볼 수있다. 범사에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악한 길에 접어들기도 어렵지만 설령 실수로 죄악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영원한 심판에 가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진실함을 가지고 소통하는 이는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
타인의 시선이 칼이 되는 시대에 살고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눈 앞에 내 생계와 깊이 연관되어있는 인물의 말에 귀기울이기 쉽다. 말씀앞에 깨어있지 않으면 나를 움직이는 모든 동력은 세속의 원리에 있게 되는 세상이니까. 본문의 여호람또한 국민여론의 기대치에 부응하느라 금송아지를 여전히 섬겼던건지도 모를 일이다.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능히 영과 육을 멸할 수 있는 존재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길 원한다. 나는 지금 주님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