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반쪽짜리 인생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by Daniel Josh


2020.07.25 말씀묵상
[왕하10:28-29]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문득 내 삶이 무척 불안하다고 느꼈다. 왜 그럴까. 마르크스식으로 이야기하면 ‘소외’될까봐 그런 것 같다. 사회의 경쟁에서 뒤쳐지고, 연인에게 버림받을까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열등의식을 느끼게 될까봐 그렇다. 우리는 보통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현실’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위해 그런 말들을 주고받곤한다.

그렇다. 간섭이라는 게 아예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정치와 질서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타인과 나의 관계 또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 속에서 나는 내가 가야할 길과 방식을 정해야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나는 혼자의 생각안에 갇혀서 불안을 느끼고 있다. 무기력을 느끼고있다. 사람은 오히려 뭔갈 끊임없이 행동하고 경험할 때는 이렇게 침잠하지 않는 것 같다. 헤엄쳐야 하니까. 오는 난관들을 쳐내야하니까.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니까. 오히려 스스로 방벽을 치지않고 사색에 잠길때 불안은 나를 더욱 덮쳐온다.

세속의 가치관과 말씀의 가치관, 둘 중에 나를 지배하는 것은 전자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무기력해지고 마음의 결이 거칠거칠해진다. 말씀을 읽기가 싫었다. 가뜩이나 생각할 것도 많은데, 말씀을 더하기가 싫었다. 생각이 많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아닌데. 결국엔 마음관리, 멘탈관리가 안되어 엉망이되어있는 상태라는 반증이다.

나는 언제나 반쪽자리 믿음이었던 것 같다. 요즘따라 내 삶 그자체에대한 회의와 의심이 든다. 왜 나는 무엇이든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을까? 아직도 되도않는 이상주의, 감상주의에 빠져있는 것 아닐까? 내가 하고싶은 무엇이든 결국에 다 해낼것이라는 보잘것없고 실현불가능한 그런 꿈에 부풀어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물학적 죽음보다 사회적 죽음이 두렵다. 빠르게 흘러가고, 안정적이어 보이는 세속의 흐름에 편입되고 싶다. 사람은 늙고, 그가 하는 생각도 함께 늙는다. 우리는 결국 다 위선주의자다. 더군다나 연약하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인 것 같으나. 결론은 같다. 내가 나를 지킬 힘조차 없어서 남을 이용한다. 힘이 없으면 결국 그렇게 된다. 자기 방어가 최우선이게 된다. 관계를, 소중한 사람을 지킬 힘을 가질 마음을 먹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반쪽자리 믿음이었던 것 같다. 결국 많은 열심을 내고 말씀을 읽어도 도달하는 결론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읽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내 삶은 여전히 세상의 바다 한가운데 익사하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잠기면 다시 호흡이 고파 주님을 찾는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한 신앙은 성숙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세속의 인생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비극이 어디있는가? 신앙도 유지하고 싶고, 세상에도 성공하고 싶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 이런 욕심이 모순이되어 서로 상충하는데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사실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다시 단 하나의 단서를 쥐고 주님앞에 나아간다. 나는 어차피 이런 존재다. 나는 어차피 이런 연약하고 죄악에 이끌리는 존재다. 그러니까 이런 희망없는 나니까, 주님 나를 봐달라고. 나를 인도하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말씀은 나의 죄를 깨닫게 한다. 주님이 없으면 나는 망할 수 밖에 없다. 예후 처럼. 죽을 수 밖에 없다. 반쪽짜리 믿음을 청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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