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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작몽상가 Oct 31. 2020

권태

오락가락한 마음

며칠 그림을 안 그렸다. 요 근래 생각이 너무 많아졌고 그 많은 생각들은 그림 그려낼 의지를 이겨버렸다. 나는 생각에게 꽤나 지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참 나약해.

어쩌다가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만약 내가 손과 눈 둘 중에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간직할까?

세상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볼 수는 있지만 손이 없어서 이를 그림으로 옮길 수 없거나 혹은 그림은 그려낼 수 있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그리는 게 좋으니 당연히 손 갖기를 택할까?

그렇지만 눈앞은 늘 깜깜한 밤이라면 그래도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과연 들까?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그려 나간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색이나 결과를 내 눈으로 보고 느낄 수가 없는데 그리는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순하게 보면 아예 보이는 것이 없는데 그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요즘은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인지 , 잘 그리고 싶은 사람인지 많은 생각을 했다.
내 그림을 그리는 것과 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다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눈과 손, 이 둘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의미 같았다.  

-2017.05

따뜻함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마저 드러내면 내 마음에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은 글을 쓰다 그림을 그리다 또 눈을 훔치다 했다. 

-2017.07


요즘엔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 아니 그냥 내가 뭔지를 잘 모르겠다.

-2017.06

너무 간절해서, 간절하다 보니 감히 손대지도 못하고 두 눈만 껌벅 거리며 한발 뒤에 서 있을 때가 있다. 스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디론가 걸어간다.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 같아 길거리를 헤매던 내가 갑자기 초라해졌다. 

-2017.06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또 독백으로 다짐하는 순간에도 사실은 불안에 떨었다. 더 작아지지 않기 위해서 너를 더 꽉 붙잡았다. 

그림에게.

-2017.07

그때는 진짜 좋았던 것들이 지금은 나를 지치게 한다.
변덕이 문제일까 열정의 문제일까. 색연필은 더 짧아지기만 했다.

-2017.05

내가 아니었던 하루 끝에는 온전히 내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있다. 내가 아닌 모습을 연기하는 것. 아주 불편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척을 해야 했고 빈틈없이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내가 너무 완벽했어서 고약하게 밉고 안쓰러웠다. 어느새 진짜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낯설어서, 돌아오는 길이 조금 메스껍다.

그래서 또 그려야만 했다. 내가 나이기 위해.

면접을 본 날.

-2017.07

요즘 그림과 조금 멀어지는 연습을 해봤다. 어느 순간 너무 집착하고 강박처럼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잘 안 되는 때를 즐기지 못하고 속상하기만 했다. 그림 그리기 외에는 몰입을 하고 무언에 집중을 하게 되는 일이 줄었고 그러다 보니 일상의 낙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서 거리를 두고 일부러 다른 일들을 해봤다. 청소나 정리를 하고, 음악을 듣고, 책 보기, 전시회 관람, 사진 찍기, 알비노 돌고래와 신기한 버섯에 대해 찾아보기, 토끼의 행동자세 관찰 등...

그런데 슬슬 이제 제자로 돌아오려고 하다 보니 여태껏 내가 그림을 피해보려고 했던 모든 짓이 결국 전부 그림의 소재로 보란 듯이 돌아왔다. 피해보려 했던 시간들이 사실은 낭비가 아닌 결국에는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위한 소비였다. 안되면서 끝까지 매달리기보다 가끔은 하고 싶은 것이 잘 되기 위해서는 조금은 샛길로 새며 딴짓을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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