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을 시달리다
나의 첫 직장은 훌륭한 곳이었다. 내 평생 만나본 선생님 중에 가장 좋은 선생님이었던 원장님. 착하고 좋은 실장님.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 다양한 진료 경험. 원장님의 올바른 소신.
첫 직장으로써는 지금 돌아봐도 완벽한 곳이고, 아직도 그곳을 나온 게 아쉬울 정도인 곳이다.
하지만, 처음 6개월 나는 찍혔다.
나를 찍은 분은 5년 차 팀장님. 지금 보면 다 도찐개찐인데 그 당시에는 하늘과 같은 연차에 직함도 어려운 팀장님이었다.
처음 시작은 환자한테 설명하는데 '목소리가 크다'였다. 내 목소리가 큰 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두 번째는 사투리. 평생을 지방에서 보냈는데 올라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지적당했지만 모두가 표준어를 쓰니 노력했다. 사실, 나는 내가 표준어 비슷하게 쓰는 줄 알기도 했다.
세 번째는 슬리퍼 소리가 크다고 지적받았다. 거슬릴 수 있으니 당연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리퍼도 가벼운 걸로 바꾸고 살금살금 걸어 다니려고 노력했지만 워낙 바쁜 치과여서 쉽지 않았다.
네 번째는 앉아서 하는 일 모든 걸 못하게 했다. 치과에서는 앉아서 재료를 만든다던지, 정리를 한다던지 하는 업무가 있을 수 있는데 내가 그런 걸 하고 있으면 기구 설거지를 시키던지 밖에 진료를 보내던지 해서 한시도 앉아있지 못하게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나와 동급인 1년 차 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웃고 이야기하며 그랬다는 게 속상했다.
나중에 친구한테 듣고 보니, 내가 인상이 쎄 보여서 저런 애는 기를 죽여놔야 된다고 했단다. 어쩐지 그 친구와는 늘 웃고 떠들면서 나만 잡더라니. 따지고 보면 그 친구도 사투리 쓰고 그랬는데. 아빠 닮은 내 얼굴이 문제였던 것이다.
다섯 번째 원장님이 지시한 업무를 내가 하면 될지 안 될지 몰라서 어리바리 탄 적이 있는데 온 진료실에 소문을 냈다. 스스로 할 수 없게 사사건건 간섭은 본인이 했으면서 내가 어리바리 타니 금세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매일이 거의 이랬는데 어느 날은 혼나고 나서 점심시간에 동기들과 앉아서 이야기하다 울게 됐다. 그래서 눈이 좀 부었는지 점심시간이 지나고 진료 준비를 위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그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어머 울었니?'
라고 물었다. 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나는 나 때문에 운 줄 알았다~'며 비웃는 투로 이야기하는데 이게 상처가 좀 됐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이 정도이지만 사사건건 쪼았던 기억이 난다.
매일 저녁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 옆 바닥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안 나게 눈물만 줄줄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당시 그 팀장님은 임신 중이었고 많이 힘들어서 더 거슬렸나 보다. 그 팀장님은 6개월 후 출산하러 가셨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여담으로 듣고 보니 돌아오고 싶다고 했으나, 내가 반대해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이러지 말아야지라고 굳게 다짐했고 지금까지 지키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