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영 Jun 29. 2020

나도 작가다 공모전-2차

게임 중독, 과연 누구의 탓인가!

 언제나 돌아올까!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또 다른 오늘이 찾아오면 늘 그렇듯 숨죽인 채 중2 아들의 모습을 살핀다. 분명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게임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느라 몸은 그야말로 천근만근일 게다. 피곤한 몸을 겨우겨우 일으켜 세워 학교에 갈 채비를 하는 아이는 표정부터 일그러져 있다. 난 행여나 그 표정을 조종하는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 분주한 척한다. 그렇게 아이는 즐거운 게임의 대가로 얻은 저질 체력을 질질 끌며 문 앞을 나선다. 물론 그렇게 군말 없이 학교에 가주기라도 하면 천만다행이다. 문제는 학교 가기 전, 엄마 탓으로 돌릴만한 일이 떡 버티고 있을 때다. 예를 들어 미리 준비물을 못 챙겼다든지 옷이 맘에 안 든다든지 숙제를 못했을 경우, 아이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온 부정적인 감정의 파편들이 나를 향해 마구 날아온다. 왜냐하면 난 엄마니까.


 꽤 된 것 같다. 아이가 혼자 게임을 하다가 두 명, 세 명, 어느새 다수의 친구들과 그룹을 지어 그룹 게임을 해온 지도. 그래도 초창기엔 시간을 정해 놓고 게임을 했다. 그러니까 할 일을 다 한 다음 남은 시간을 이용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게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거의 온종일 게임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늘 지켜보는 난 거의 도 닦은 스님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도 여느 엄마들처럼 막 소리도 지르고, 쉴 새 없이 잔소리도 퍼붓는 그런 엄마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의 덩치도 커지고, 아이를 올려다봐야 하는 시기, 특히 사춘기라서 말 한마디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야말로 집안이 초토화될 수 있기에 난 아이의 방문을 살며시 열고 “이제 게임 좀 적당히 해야지.”라는 영혼 없는 잔소리를 한다.


 사실 난 게임의 세계가 너무 무섭다. 아이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컴퓨터 화면은 금방이라도 빨려 들 것 같은 생생한 그래픽과 판타스틱한 배경이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마치 자신이 그 화면 속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희열을 느끼며 즐거워한다. 그때만큼이나 행복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도 없었다. 아이는 게임을 하면서 감정이 극에서 극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때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가 하면 때론 친구들과 서로 욕을 퍼부으면서 네가 잘못해서 게임을 졌다느니 하며 서로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솔직히 엄마 입장에서 뭐하는 짓들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렇다고 딱히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조차 감히 이들 때문에 못 쳐들어온다는 그 무시무시한 중2, 그것도 시커먼 사내 녀석이니까.


 이제는 게임 중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아이의 머릿속은 온통 게임으로 뒤덮여 있다. 무슨 얘기만 하면 다 게임과 관련된 얘기들로 접근한다.


 “난 인성이 바른 사람이 제일 좋더라.”

 “당연하지.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인성이 바르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게임을 할 때도 성격은 정말 착한데, 게임을 못 하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속 터진다고요.”

 “얘는 또 그 얘기를 게임과 연결시키네.”


 아이는 효자다. 갑자기 무슨 귀신 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게임에 푹 빠져 있다 보니 그나마 다니던 수학, 영어 학원을 모두 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나 할까? 아이 누나가 올해 특목고에 입학을 하다 보니 돈이 거의 천문학적으로 들어간다. 학교 분기별 수업료, 셔틀비, 급식비, 교과서 대금, 기타 등등. 게다가 사교육비까지. 그나마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에게 들어갈 돈이 고스란히 누나에게 들어가다 보니 매달 교육비 가지고 시름해야 할 부모로서는 나름 효도를 한 셈인 것이다. 솔직히 이런 상황 속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무척 난감한 것만은 사실이다. 누나를 향한 동생의 희생이 결코 명예로운 희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은 학원에 가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다 보니 오히려 얼굴빛은 환해졌다.  


 아마도 이쯤 해서 그래도 부모인데, 아이의 무분별한 게임 문제에 너무 너그러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난 어떻게 해서든 게임을 못 하게 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열혈엄마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말로 해서 통제가 안 되면 몸싸움까지도 서슴없이 강행했던 그런 살벌한 엄마였다고 할까! 지금도 아이의 방은 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옷장 문은 양쪽의 문이 틀어져 있고, 벽 한쪽은 딱 주먹 만한 크기로 움푹 패어있다. 물론 방바닥은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로 가득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매번 아이를 학원에 보낼 때마다 마치 일하기 싫은 소를 억지로 잡아끄는 그런 진땀 빼는 광경들이 펼쳐지곤 했는데……. 언젠가 아프다는 핑계로 학원을 빠지고 방안에 누워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아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그동안 참았던 분노가 솟구쳐 올라 주방에서 젓가락 하나를 빼들고 아이의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모니터 뒤 벽 쪽을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아이에게 겁만 주려고 했던 것이지 그 비싼 모니터를 부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젓가락은 처음엔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가줬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벽을 맞고 다시 튕겨져 나와 모니터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니가!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니터의 심장을 콕하고 찔렀다. 이후 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고, 다시 같은 모델의 새 모니터가 아이의 방문을 노크했다.


 너무 힘들다. 난 때때로 마이크로 소프트 창시자인 빌 게이츠를 원망한다. 정작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는 스마트폰의 중독성을 철저하게 인식시켰으면서 왜 다른 부모들의 자식들은 더 나은 스마트폰을 사게끔 부추겼을까 싶다. 난 어떻게 보면 내 아이의 게임 중독, 스마트중독을 미리 막지 못한 고개 숙인 엄마 중의 한 사람이다. 이제는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것 같다. 진작 무슨 조치라도 취했더라면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해보고, 혹시라도 어떤 계기가 생겨 게임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도 가져보지만 지금으로서는 뿌연 안개 속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다. 다만, 아이가 언젠가는 가슴이 없는 차가운 기계에 신물이 나 가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만 가져 볼 뿐이다. 두렵다!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한 사람으로서.

작가의 이전글 사춘기 엄마 처방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