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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04.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거저 얻은 것에 대한 엄청난 대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딱 준만큼만 받게 되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인 것 같더구나.”


 예전에 나이가 지긋이 든 어느 어르신이 누군가에게 한 얘기다. 옆에서 있다가 얼핏 들은 얘기였는데 그땐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게다. 보통 사람들은 공짜를 너무 좋아한다. 왠지 힘들이지 않고, 거저 얻은 것 같은 쾌감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 역시도 어떤 물건이냐에 상관없이 1+1에는 무조건 눈이 "홱" 돌아가곤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1+1의 경우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를 그냥 공짜로 주는 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의 눈속임이라든지, 가격의 눈속임이라든지, 유통기한의 임박함이 그것이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마트에 가면 1+1 상품은 거두절미하고 무조건 카트기에 쏙 집어넣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유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짜는 내 마음을 무척 설레게 한다. 아무래도 거저 얻는 쾌감이 우리의 뇌를 통제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여하튼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공짜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와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떠한 사건 이후로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친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물론 얼굴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냥 그 친구와 나 사이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사건만 기억할 뿐이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친구가 나에게 자꾸만 접근해왔다. 그러면서 하교 후 자신이 맛있는 것을 사 줄 테니 같이 놀자는 것이다. 난 딱히 할 일도 없었거니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하교 후 또 다른 만남을 이어나갔다.


 그 친구는 나에게 택시를 타고 번화가로 나가자고 했다. 그래서 난 그냥 그 친구가 하자는 대로 그대로 따랐고, 어느새 우리는 시내 한복판을 거닐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우리들이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여하튼 난 그 친구만 믿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치 환상의 세계로 여행하는 듯했다. 특히 그 친구는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 나에게 많은 것을 사주면서 환심을 샀다. 그 순간, 난 의심이고 뭐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린 마음에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 당시 바나나는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었던 무척 귀한 열대 과일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트나 시장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일로서 한손에 약 4000∼5000원 정도 한다. 그렇다면 한손에 바나나가 8개 정도 달려있다고 가정했을 때, 한 개 당 500∼600원 정도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당시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이 500원이었다. 게다가 워낙 귀하다 보니 한손이 아닌 낱개로 1개씩 뜯어서 팔았다. 그 친구는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빼더니 바나나 2개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한 개를 건네줬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먹었던 바나나 맛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싶어 했던 인형이 있었다. 관절이 자유자재로 꺾이는 마로니 인형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다양한 옷과 구두는 물론 인형놀이 세트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여자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잇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인형을 내 품에 안겨주기까지 했다. 귀하디 귀한 바나나에 이어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마로니 인형까지. 정말이지 난 가슴이 너무 벅차오른 나머지 "뻥"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 친구와 난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신나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한편 그 시각, 나의 부모님은 아무런 소식이 없는 내가 무척 걱정스러웠는지 안절부절못한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밖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시곗바늘이 밤 9시로 향하고 있을 때쯤, 난 앞으로 닥칠 엄청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른 채 즐거운 마음으로 집 대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현관 앞에 경찰관 아저씨 두 분이 떡 버티고 서 있었고, 나를 주시하는 부모님의 얼굴은 아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감지했다.


 결국 경찰관 아저씨들은 돌아가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빠는 회초리로 나의 종아리를 심하게 때렸다. 다시는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늦게 그 친구의 부모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오늘 쓴 돈에 대해서 일부 물어내라는 것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재차 물었고, 돌아오는 답변은 자신의 딸이 중학생인 오빠의 등록금을 몰래 훔쳐갔다고 했다. 그리고 한 푼도 남김없이 전부 썼다는 것이다. 순간 난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엄마는 더 이상 따지지 않은 채 곧바로 돈의 일부를 돌려줬다.


 그날 밤, 난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이후부터 난 공짜에 대한 약간의 불신이 생겼다고나 할까? 물론 마트에서 파는 1+1의 경우, 1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내 기준으로 볼 때, 하나는 비록 공짜로 얻었을지언정 하나는 당당히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사건 이후로 누군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물질적으로 접근하면 머릿속에서 항상 물음표가 달리곤 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어느 정도의 선을 그으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나에게 베푸는 호의를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면 나도 그만큼의 보답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내 성의는 표현을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사실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준만큼 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죽하면 조건 없는 봉사에도 결국 자신의 이기심이 먼저 발휘된다는 얘기가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봉사를 보면 받는 상대방의 기분보다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내 만족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해서 아무리 조건 없는 봉사라고 하더라도 뭔가 뿌듯한 느낌이 없다면 다음에는 그 봉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 한 얘기이긴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봉사를 통해 내 마음의 뿌듯함을 먼저 느끼고자 했던 경우가 많았다.


 세상에 딱히 답은 없겠지만 일방적으로 주거나 반대로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는 절대로 오래 유지될 수 없음을 얘기하고 싶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관계에 있어서 주기만 하는 경우에는 분명 언젠가는 지칠 것이고, 받기만 하는 경우 역시 분명 언젠가는 부담감으로 인해 결국 그 관계는 깨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상생관계’가 아닐까 싶다.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까마득한 그 옛날, 거저 얻은 것에 대한 대가는……. 무서운 경찰관 아저씨, 날카로운 회초리, 억울한 보상, 잊고 싶은 기억, 부모님을 향한 죄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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