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엄마”로 불리기 시작했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은 생각보다 조용히, 그러나 아주 오래 남았다.
이름은 지워지고, 호칭만 남았다. 나는 여전히 나인데, 세상은 나를 아이의 그림자로 불렀다. 그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이름은 여전히 내 안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 내 이름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내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 ‘누구 엄마’라는 새로운 호칭이 내 자리를 차지했다. 결혼 전, 나를 향해 불러주었던 그 이름 석 자. 이후 결혼식장에서 축복받던 신부의 이름, 병원 출산실에서 환영받던 산모의 이름조차도 희미해졌다. 남은 것은 아이 이름 뒤에 따라붙는 ‘엄마’라는 꼬리표였다.
집안 어르신들은 나를 향해 ‘누구 애미’라고 불렀고, 동네 엄마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나를 ‘누구 엄마’로만 불렀다. 심지어 내 휴대전화 주소록에도 ‘○○ 엄마’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나 역시 그게 당연한 것처럼 저장해왔다. 그렇게 엄마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이름 뒤에 숨어 살았다. 예컨대, 상대방이 연장자일 경우엔 아이 이름 뒤에 언니가 따라붙기도 했다. 예를 들어 ‘○○ 언니’처럼 말이다. 그건 아마도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 엄마’라고 부르는 게 다소 예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통해 만나게 된 수많은 엄마들을 떠올려 봤을 때 그들의 이름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아이와 누구 엄마를 매치시키며 그 엄마를 기억할 뿐이었다. 그저 ‘누구 엄마’라는 이름표가 그 사람의 전부였던 그 시절, 나 또한 누구 엄마로 불리었고,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과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꽤 오랜 시간 동안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아이의 이름이 빛날수록 엄마의 이름은 그림자처럼 뒤로 물러나고 있었음을.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나 스스로를 꾸밀 겨를이 없었다. 가능한 한 허리가 죽죽 늘어나는 편한 고무줄 스판 바지에 땀 흡수가 잘 되는 면 티셔츠가 기본 복장이었고, 머리는 딱히 손질이 필요 없는 올백으로 질끈 묶어 올린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결혼 전에는 그나마 기본 화장 정도는 하곤 했는데, 다 귀찮아지면서 그나마 몇몇 화장품들도 화장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었다. 내 몸과 마음은 오롯이 아이들을 위해 소진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나를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작은 변화를 시도해 봤다. 아이들 소속 초등학교 내 어머니 합창단 모임에서 ‘누구 엄마’가 아닌 이름을 불렀다. “민수 엄마”가 아닌 “혜진 씨”, “지우 엄마”가 아닌 “선영 씨”로.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름을 부르자 그 사람만의 색깔이 서서히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표정이 달라졌고,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김춘수 시인에 ‘꽃’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삶의 대부분은 ‘누구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어느 모임에서든 아이 관련 이야기만 오가는 대화 속에서는 내가 문득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취향은 뒷전으로 밀리고, 엄마라는 역할만이 전면에 남아 아이의 그림자 모임이 되어버린다. 그때마다 내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왜 사라져야만 하는가.”
이 물음은 어쩌면 대부분의 엄마들이 겪는 공통의 회한일지도 모른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책임만 남았 다. 아이가 잘 자라야 하고, 학교에서 문제없이 생활해야 하며,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들이 내 일상 곳곳에 들어와 나를 대신 살아갔다. 그 속에서 점점 ‘엄마로서의 나’와 ‘나 자신으로서의 나’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거울 앞에서도, 대화 중에도, 심지어 혼자 있는 시간조차도 습관적으로 ‘엄마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기쁨과 슬픔의 온도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모성’이라는 단어는 사회가 만든 가장 완벽한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과 희생이 한 몸처럼 포장된 그 단어 안에서 여성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아이가 성장해 독립할 즈음, 우리는 문득 낯선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그제야 깨닫는다. 내 안의 여자가 얼마나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는지를, 그리고 이제는 그 여자를 깨워야 할 때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 죽지만, 이름은 우리가 살아온 흔적으로 남는다.” 이 문장을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는 여러 이름으로 살아왔고, 엄마로 살아왔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 엄마’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나로 살아가야겠다는 간절함이 밀려온다. 그 모든 이름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또 이런 말도 오래 남는다. “개인의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의 개성도 함께 잊힌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서 있는지가 흐릿해지는 일과도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엄마’로만 불리고 싶지 않다. 그것은 사랑을 거부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도 나의 이름을 지키고 싶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아이를 위해 존재하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을 되찾고 싶다. 삶의 무게를 견디며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왔던 나에게, 이제는 스스로의 그림자를 찾아주고 싶다. 그것이 이 긴 여정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아이를 키우는 일이 결국 나를 키우는 일이었던 것처럼, 나는 또 한 번 성장의 문턱에 서 있다.
혹시, 당신은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불려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이름, 당신의 취향, 당신의 감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다’라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엄마이기 이전에, 당신은 한 사람의 존재로 충분히 빛났다. 이 책이 그 빛을 다시 바라보는 작은 거울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엄마’로만 불리고 싶지 않다. 그것은 사랑을 거부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