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했으면
괜찮은 부모 아닙니까

내려놓자 아이가 자랐다

by 김미영

아이를 위해서라고 믿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자, 그제야 아이가 숨쉬기 시작했다.


가끔은 어른이 무너져야 아이가 숨을 쉰다.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모습보다는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한 모습일 때, 오히려 아이는 안도감을 느낀다. 부모의 약함이 아이의 틈새를 채워주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건, 어쩌면 연극 무대에 서는 일과 닮아 있었다. 무대 위 배우처럼 내 본심을 감춘 채, 장면마다 달라지는 역할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것이 결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가식적인 몸짓이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집안의 어두운 공기를 조금이나마 환기시키기 위해서라도, 아이들과의 어색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부도 잘 못 하고, 표현도 다소 서툰 편이다. 그런 내가 사춘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날 선 말다툼, 깊은 상처,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감, 급기야는 누군가 집을 뛰쳐나갈 수도 있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까지 예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차라리 ‘연기’를 하자. 내 성격을 숨기고,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연하게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처음엔 무척 어색했다. 무엇보다도 사춘기 아이들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연기를 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생존의 수단으로써 서서히 연기자가 되어 갔다.


한 번은 큰딸과 지하 주차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딸이 장난스럽게 내 뒷목 옷깃을 확 잡아당겼다. 나보다 덩치도 크고, 키도 큰 아이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장난이었다. 순간, 나는 우스꽝스럽게 앞으로 고꾸라지듯 몸을 숙이며, 삐에로가 된 듯한 춤을 췄다. 딸의 손에 끌려 어설프게 흔들리는 엄마의 모습, 마치 작은 인형이 큰 거인의 손아귀에 잡힌 듯한 광경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그런데 뜻밖에도 늘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딸의 입에서 그날따라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깔깔거리며 웃는 그 모습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비록 ‘바보 같은 엄마’가 되는 순간이었지만, 그 어설픈 몸짓이 딸에게 있어서는 답답한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환기를 시켜준 셈이다. 그때 그 웃음, 그 웃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사춘기 터널 속에서 세상 무엇보다 값진 선물로 다가왔다.


아들과의 장면도 비슷했다. 당시, 게임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던 아이는 아침이든 밤이든 모니터 앞에서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때마다 내 성격을 숨겼다. 대신 ‘소심한 엄마’라는 역할을 선택했다. 솔직히 그 역할은 나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그런 역할이었다.


고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의 방문을 살짝 열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제 좀 그만해야지….” 하고 중얼거리듯 말한 뒤 다시 얼른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그렇게 문밖에 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이 앞에서 기죽은 엄마처럼 연기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무섭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 당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대로 아이에게 쏟아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의 관계는 산산조각 났을지도 모르겠다.


“○○아, 너 바, 밥 먹었어?”


그 시절, 나는 수없이 무너졌다. 가끔은 엄마로서 무너지는 척하기도 했지만, 진짜로 무너졌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숨겼다. 엄마가 무너지면 아이들도 무너지기에 그 무너짐을 어설픈 연기로 채워 넣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틈에서 자랐다. 완벽하지 않은 엄마, 가끔은 바보 같고, 소심한 엄마를 보면서 아이들도 저마다의 숨통을 찾았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무시무시한 사춘기 아이 앞에서 말까지 더듬는 부모도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완벽함이 깨지는 순간이었고, 내가 믿어온 이상적인 부모상이 무너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엔 그게 너무 두려웠다. 아이 앞에서 흔들리는 내 모습을 들킬까 봐. 나약한 엄마로 보일까 봐. 하지만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이는 부모의 강함만으로 크는 게 아니라, 부모의 무너짐을 통해서도 배운다. 내가 조금씩 무너질 때마다 아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배워가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진실된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무너지는 것은 새로운 힘을 낳는다.” 이 문장을 내 삶에 비추어 보면, 그 당시 아이들은 내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고, 조금씩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자기 길을 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가장 큰 자유를 주는 일이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엄마인 내가 권위를 내려놓자,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고, 그 자유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강인함을 연기하는 일이 아니라, 적절히 무너져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너짐을 통해 아이는 자라고, 부모는 다시 일어선다. 결국 부모의 완벽함으로는 사춘기를 건널 수 없다. 오히려 부모가 잠시 내려놓을 때, 아이가 스스로 설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엄마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도 성장한다는 씁쓸한 현실. 그것이 내가 사춘기를 지나오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부모로서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실패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이의 눈으로 보면 그건 오히려 배움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완벽하려고 애쓸수록 마음은 닫히고, 진심을 보여줄수록 마음은 열린다. 당신이 무너졌던 그날이, 사실은 아이가 자라던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모의 상처와 흔들림 속에서 아이는 삶의 단단한 뿌리를 배우고 있을 테니까.


<이 문장 앞에서>

가끔은 어른이 무너져야 아이가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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