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첫째 아이를 향한 욕망
초등학교 1학년 큰아이 입학식이 있던 날, 설레는 마음으로 **초등학교 강당에 도착했다. 성북구에서는 워낙 명문초등학교로 통하는지라 아이들이 많이 몰렸다. ‘시끌벅적’, ‘웅성웅성’ 강당 앞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반별로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나도 부랴부랴 반을 찾아서 아이를 넣어 주고, 이제 학부모가 되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주위를 죽 한번 둘러보니 모든 부모들이 한가득 꽃다발을 안고 자신의 아이를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앞으로 아이를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는 게 우리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도 어떤 분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또한 1년 동안 같이 지낼 반 친구들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내 아이와 단짝 친구는 과연 누가 될지 한껏 기대에 차 있었다. 여하튼 첫째 아이라서 그런지 모든 게 다 궁금했고, 하루하루 아이를 향한 욕망으로 넘쳐났다.
첫 단추부터 잘 끼우고 싶었다. 뭐든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나머지 마음이 급했다. 피아노도 시켜야 할 것 같고, 영어도, 운동도, 논술도, 한자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긴다. 중학생들도 키워 보니 아직 아기인데, 한참 아기인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도대체 뭘 바라겠다고 그런 욕심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아이들 육아 부분에 있어서 첫 경험이다 보니 오로지 의욕만 앞섰던 것 같다.
게다가 1학년이라서 그런지 같은 반 엄마들하고도 꽤 자주 만났다. 그리고 대부분 첫째 아이들인 경우가 많았던 탓에 관심이 온통 아이와 관련된 얘기였다. “영어 학원은 어디 보내나요?”, “거기 피아노 학원 잘 못 가르친다고 하던데요.”, “우와! 발레 학원에 다녀서 몸이 예쁜가 봐요.”, “수학 선행은 어디까지 했어요?”, “우리 아이는 외국에 몇 년 있다가 왔어요.”, “그럼, 영어를 잘하겠네요?” 등등 온통 아이와 관련된 얘기뿐이었다.
다소 주눅이 들었다. 물론 내 아이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들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보니 자칫 엄마들끼리 서로 질투하고, 경쟁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물론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잘하는 아이 엄마한테 질투도 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너무 확연히 드러나는 게 문제였다. 한 번은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엄마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이가 뛰쳐나오더니 엄마한테 ‘그리기상’을 받았다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옆에서 지켜보던 또 다른 엄마가 모두 다 듣는 앞에서 “왜 내 아이는 상을 못 받은 거야? 도대체 뭘 못해서? 우리 아이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데…….” 하며 얼굴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고 한다.
정말 기가 막혔다. 아무리 질투가 나더라도 엄마들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얘기하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 엄마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엄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안 좋게 났다. 그러다 보니 아이까지도 이미지가 나빠져 아이들 사이에서조차 꺼리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내 아이를 향한 욕망은 자칫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아무런 죄 없는 내 아이한테까지 욕을 얻어먹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그 엄마를 통해 깨달았다.
하지만 나도 엄마다. 내 아이를 향한 끝없는 욕망이 왜 없겠는가! 특히 첫째 아이라서 다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도 보냈고, 태권도 학원, 집에서 하는 튼튼 영어, 한우리 독서논술도 시켰다. 특히 결혼 전에는 작가 생활, 결혼 후에는 논술 교사로 일을 했기 때문에 책 읽기와 글쓰기만큼은 내 아이에게 확실하게 가르치고 싶은 욕망이 컸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한우리 독서논술 방문 수업을 시켰는데, 수업 시간마다 잘 못 알아듣는지 계속해서 졸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교재를 통한 수업이 그 어린아이한테 얼마나 딱딱하고 재미없었을까 싶다.
물론 그 시기에 시켰던 교육이 아이한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 무언가가 서서히 계속해서 스며들었을 것이다. 다만 아이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수업에 임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런데 딸아이는 그다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그냥 시키는 대로 무난하게 따라와 줬다.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튼튼 영어 방문 수업을 시켰는데 선생님도 무척 활기찼고, 아이도 재미있게 수업에 참여했다. 특히 방문 수업을 통한 선생님들의 반응이 하나같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내 아이가 너무 잘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다 그런 식으로 칭찬을 해줬다고 한다.
여하튼 그러다 보니 아이를 향한 욕망이 점점 더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엇을 하든지 기대 이상으로 항상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아이한테 자꾸만 더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또 생각해 낸 것이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어휘는 대부분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를 알면 어휘도 금방 늘 거라고 판단해서다. 이처럼 아이를 향한 욕망은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걸로 나타났다. 피타고라스의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른다.’라는 말처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도 서서히 지쳐갔다. 프랭클린의 ‘욕망의 절반이 이루어지면 고통은 두 배가 될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쯤 해서 영국 시인인 알프레드 데니슨의 시 한 편을 띄워 본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한 송이,
그러나 내가 너를, 뿌리와 너의 모든 것을, 그 모두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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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향한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아이가 무엇이든지 잘해주면 부모로서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아이는 부모한테 칭찬받기 위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까지 좋아하는 척하며 받아들인다. 하지만 결국 부모가 시켜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한계는 아이의 사춘기를 통해 엄청난 분노로 폭발한다. 부모 또한 아이를 향한 욕망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