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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비 Jun 27. 2024

자유와 불안 사이

치즈 케이크랑 커피를 먹다가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광화문 역 인근의 카페 도착.

오기 전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서 사온 책 3권 중에 1권인, 조르주 페렉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를 웬만하면 다 읽고 갈 심산으로(매우 얇은 두께의 책) 부지런히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책을 다시 덮고 주섬주섬 가방 안의 노트를 찾아 펼친다. 오늘, 아니 지금, 여기까지 일어난 일을 짤막하게 써봐야겠다. 여러모로 지금 당장 잡아두고 써야만 했다(지금 내 오른쪽 1시 방향 대각선의 외국인 남자를 의식해서 라고 덧붙여 솔직한 이유를 추가로 밝힌다)



백수로, 아니 이 단어 말고 일이 없은지, 아니 이 단어는 더 별로인데..... 아무튼 생계가 달린 일을 그만두고서 자유롭게 지내보고 있는 요즘(아 여기까지 쓰는데 외국인이 카페를 지금 나가고 말았다). 굳이 이 시기를 먼저 짚고 넘어가보자면, 그래도 아직은 이 부유를 그럭저럭 즐기고 있는 듯 하나 동시에 심심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일상의 기본값으로 응집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혼자인 것을, 혼자 있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끔찍이 아끼고 소중한 것 그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제는 나 혼자 남겨져있는 이 넘치는 시간이 군데군데 쓸쓸함의 얼룩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비로소 인정한다. 아마도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할 복합적인 쓸쓸함 뭉텅이.


자유로움과 동시에 불안함. 돈이 있음과 동시에 없는 것. 즐기는 것과 동시에 소진되는 것. 밤 그리고 아침.

최근 아니지 어제, 드디어 집 밖을 하릴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고 안전하게, 정해진 시간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앉아있을 수 있는 아지트를 발견해서 기쁘다.


아지트 정체: 동네에 있는 큰 도서관.


어제 처음 가봤다. 이런 곳을 왜 이제야 찾아왔을까 싶을 만큼 꽤 크게 놀랐다. 독서 목적 외에도 다양한 목적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다양하게 자기만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노트북, 거북목 방지용 노트북 거치대, 두껍기도 하고 얇기도 한 학습지 같은 것들.


도서관 바로 맞은 편에는 내가 아끼는 단골 카페가 있어서(여기도 알게 된지 얼마 안된 보석 같은 아지트) 두 곳을 왔다갔다 넘나들며 대략 6시간 정도의 하루 반나절을 보낼 수가 있다. 그러면 대충 6시가 되어가는 저녁이 된다. 요즘엔 해가 길어져 밤 8시가 넘어가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퇴사를 하고서 생겨난 루트대로 비슷한 시간 비슷한 목적지를 향해 한강을 따라 든든한 서울 공공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시원하게 밟는다.


나만의 반환점에 도착하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벤치 중에서 또는 적당하게 앉기 좋은 어설픈 나무 판자 자리 한구석에 앉아서 이제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앉아있는다. 바로 눈 앞에 가까이 보이는 한강물과 저만치 그 경계에 어렴풋이 놓여있는 큼지막한 산들을 본다. 그 옆으로 멋지게 펼처진 대교 다리로 시선을 옮긴다. 그러면 다시 눈 앞으로 돌아와 바로 앞에서 낚시를 하는, 이 구역 진짜 단골 아저씨들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핸드폰을 킨다. 완전히 어두워지고나면 그제서야 자전거 잠금 장치를 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광화문 카페에 온 오늘의 일을 적어두려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말이 새버린건지. 근황 보고의 목적으로 적어둔 셈 치지 뭐. 오늘 광화문 교보문고를 부러 찾은 이유가 있다.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재고가 있는 이 곳으로 왔다. 찰스 부코스키의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널찍한 규모를 보유한 만큼 고민하고 있었던 다른 책들도 사람들과 섞여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다. 또 괜히, '광화문 교보문고' 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보기로 다짐한 만큼 고전 책부터 읽고 싶어서 고전 코너부터 찾았다. 아, 그 전에. 원래의 목적이었던 찰스 부코스키의 그 시집은 오는 동안 그새 '재고 없음'으로 바뀌어있었다. 재고 1권 보유 중이기는 했지만... 근처에 몇몇 매장만이 재고를 가지고 있었고 전부 그 1권만이 최대였다. 어쩔 수 없지..... 동네 지점의 서점에서 다시 구하기로 하고 다른 후보 주자들을 탐색했다.



총 3권을 골랐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작고 작은 나의 방 한 구석에서 차곡차곡 쌓이며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훌륭한 책들을 다시 읽기 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오랜만에 책 쇼핑을 좀 했다. 서점을 나와서 근처 카페를 검색했다. '광화문 혼자 카페 추천'.... 수많은 카페 목록들 가운데 깐깐한 검열을 거치고 있으니 금세 기가 빨리고 중도에 멈춰버렸다. 그냥 지금 이 중에 아무데나 가자...


도로 변에 위치한 듯한, 화이트 톤의 깔끔해보이는 이미지를 대강 확인한 뒤 좌표를 찍고 걸어가려는데 바로 눈 앞에 비슷하게 깔끔한 분위기의 외관을 뽐내고 있는 카페를 마주쳤다. '여기 옛날에 엄청 핫한 카페 아니였나?...' 군데군데 자리가 꽤 보였다. 이미 머릿 속에서는 온갖 시뮬레이션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래서 막상 들어가면 너 또 실망할거잖아...' 이미 기대는 안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들어가볼까... 크고 웅장한 문을 밀고 들어가면 대형 카페답게 높은 천장과 특유의 웅성거림이 맞이한다. 직원들의 인사는 생략된다. 10년을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디를 가면 그 집의 서비스를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의식하는 버릇이 생겼다. 타인의 태도에 쉽게 영향 받는 나는 잠깐 기분이 상하지만, 그러면 '나'는 그동안 환한 미소와 적극적이고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했느냐 자문해봤을 때 할 말을 잃어버리고 그럭저럭 이해하고 넘긴다.



단호박 치즈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고 뒤이어 입 속으로 들여넣은 케이크마저 맛있어서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앉아서 책을 펼친지 얼마 되지 않아, (글의 처음 시작에서 언급한)외국인 남자가 다음으로 똑같이 큰 문을 열고 들어온다.


운동복 차림의 편한 반팔 반바지를 입고서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걸친 이 외국인은 들어오기 전 나랑 똑같이 카페 외관을 한번 훑으며 지나가는 듯 하다가 반바퀴를 한번 더 가서 탐색한 뒤 다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을 창문 앞에 앉은 나는 어쩔 수 없이 봐버렸다. 속에서 오지랖이 발동된다. '들어와보니 어떤가요 그 나라 카페 문화는 여기 한국이랑 많이 다른가요' '노래는 시끄럽지 않나요' '저도 방금 들어왔는데 이러고 저랬답니다'... 그다지 쓸데 없어보이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으나 절대 내색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책만 쳐다본다.


주문을 마친 외국인은 내 맞은편 사선의(마주보고 있으나 거리가 있는) 자리에 앉는다. 나와 똑같은 메뉴(단호박 치즈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 그 많은 디저트들 중에 이 단호박 맛 나는 치즈 케이크를 선택했다는거지.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흘끗 쳐다봤을 때 눈이 마주친다.


외국인은 핸드폰을 보며 적당한 시간을 보낸 뒤 금방 나갔고 오래 있을 작정으로 들어온 나는 이어서 할 일을 한다. 이 잠깐의 일을 써두고 싶어져서 책을 잠깐 덮고 노트를 펼쳤던건데. 시간이 벌써 한 시간 가까이 흐른 것 같다. 마저 조금 더 읽다가 슬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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