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패스파인더>
솔직히 웹소설의 설정들로 아무리 주인공에게 가혹한 환경을 만들어 일명 피폐물의 칭호를 얻는다 해도 그 가혹함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독자들을 배신해버리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삶이 진정으로 어렵노라고, 판소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판소에서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이 힘은 너무 쉽게 주어져서는 안되고, 주인공의 훗날 성공을 담보하면서도 그 보상이 짜릿하도록 적어도 극초반엔 진짜 그 힘을 손에 넣기가 어려워 보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히트작들은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꽤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예 기존에 없던 포맷을 도입하는 것은 곤란하고, 가지고 있던 재료 내에서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길을 찾으니 여행이 끝났다고, 이미 제시한적 있는 패러다임을 변형 없이 다시 차용하는 순간, 원래 그것이 얼마나 새롭고 매력적이었든지 간에, 그 소설을 읽는 것은 새로운 '여행'이 될 수 없다. 이번 소설을 읽는 독자들 대부분이 앞선 히트작들을 읽었을 것이고, 그 길을 통한 독자들의 여행은 그 소설이 완결되면서, 혹은 그보다도 더 일찍 끝났다. 대부분 호기롭게 시작했던 히트작들도 중반부 부터는 도무지 자신만의 여행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대부분의 긴장감이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과 그 캐릭터와 주인공의 관계성에서 오거나, 던전이나 이세계 라는 손쉬운 장치를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데서 온다. 그래서, 초반을 지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여행은 끝난줄도 모르게 끝나있다.
이 루트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판소의 포맷은(혹은 판소가 간직하고 있는 재료는) 기본적으로 주인공과 독자들의 욕망에 어떻게든 부응하려 안달나있기 때문이다. 스탯, 스킬, 아이템, S급과 F급이라는 극단적인 등급제는 얼핏 그 경계가 너무 확고해서 전복하기 어려워보이지만, 오히려 너무나 뚜렷하기에 넘어야 할 대상이 명확하고, 그 방법 또한 급수가 나뉘어져 있지만 그렇기에 친절하게도 단계적이다. 자, 이 모든 규칙을 지키면서, 어떻게 주인공에게 전에 독자들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역경을 안겨줄 것인가? 그러면서도, 주인공은 차곡차곡 성장해야 한다. 그것은 판소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담보해야만 하는 요소다. 어떻게 할 것인가?
패스파인더는 이렇게 했다.
보통 판소들이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전부 채워주면서도 주인공에 이입한 독자들이 정말로 원하는건 주지 않았다. 절묘하게 힘,돈,인연 다 주면서도 사람들을 버석버석 마르게 만든다. 패스파인더를 보고 있으면 원초적인 욕망들이 죄다 말라 비틀어지고 아 이래서 열반에 이르고자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싶어진다.
패스를 통해서라면 '무엇이든' 할(살) 수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강조하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는 순간들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우연이기도 하고, 타이밍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하고, 가람이라는 주체가 있는 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인식상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행위자인 가람의 인식을 넘어선 것들, 혹은 가람이 이미 겪어버리고 인지해버린 것들은 패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또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패스라는 물질(?)은 따지고 보면 다른 판소에서 몬스터 잡으면 아이템이나 스킬이 보상으로 나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부분에 작가는 딴지를 거는데,다른 판소에서도 아이템이나 스킬 따위를 이용할 수 있는건 각성자, 혹은 헌터들로 이는 그들이 비각성자와 구별시켜주는 특권이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물음표를 던지는데, 그렇다면 대체 각성 후의 각성자들이 여전히 인간이고, 또 다른 인간들을 스스로와 당연한듯 동일시 하는 이유가 뭐지? 각성자들의 인간성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여기서 각성자의 인간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 기준의 윤리 규범을 어긴 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각성자가 여전히 스스로를 각성하기 이전과 같은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는가, 즉 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동기 수준의 손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각성을 하고도 인간 사회를 보위하는가? 왜 여전히 인간 규범을 지키는 것을 당연시하는가? 보통 내가 흥미를 넘어서 공감까지 할 수 있었던 판소들은 작가가 이를 의식하며 쓴 소설이 많았던 것 같다.
다만 대부분의 판소들이 이런 점을 의식하지 않고 쓴다 해도 별 위화감이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보통 판소에서는 각성자'들'이 등장한다. 각성자들의 사회의 존재 자체가 각성자의 인간성의 지지대였던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붕괴하고 기관이 타락해도 동류의 사람들이 있고 집단이 있으면 사회가 있고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실제 사회에서도 각성자'들'이 있으면 각성자는 아마 인간 목숨이 오락가락 하게 되고 기적을 포인트로 살 수 있는 세계가 와도 그럭저럭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패스파인더에서 주인공 가람은 (거의)홀로 각성자다. 자기 외에 하나 더 있는 각성자는 또라이 싸이코패스 뿐이다. 주인공 가람에게 여러 인연이 생기긴 하지만 흔히 판소에서 차원이동, 회귀가 동반하는 고독을 압도하는 낭만적인 인연이 생기지가 않는다. 차원이동자와 회귀자가 고독한 이유는 결과적으로 그것을 압도하는 이전보다 끈끈하고 강렬한 관계성을 갖게 하기 위함인데 가람의 이세계 인연은 절대 그 고독을 감수할만한 보상이 되어주지 못한다.
따라서 가람이 뮐러 웨이크가 죽었다가 시간을 되돌려 다시 만난 순간도 묘한 뒷맛을 주는데, 재회가 단순히 두사람의 생존을 바랐던 독자들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뮐러와 웨이크 조차 가람이의 궁극적인 안식처(혹은 극적일만큼 낭만적인 인연)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느낌.
가람이가 패스파인더로서 인간의 목숨에 대한 저울추 바꾸는 순간을 독자들이 목격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시킨 느낌이다.
작가님이 뮐러와 웨이크의 죽음으로 인해 두사람과 가람이의 관계가 신성시 되는걸 막으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가람에게 뮐러가 남겼던 편지 내용은 재회하기 전까진 뮐러의 유언이었지만, 길 위에서 평이하게 헤어질때 뮐러의 입에서 반복되면서 순식간에 그저 좋은 동료에게 남기는 평범한 인삿말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재회에는 안도감이 있었고 헤어짐엔 아쉬움이 있었으니 정말 여러모로 좋았던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