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겨을의 <레드 앤 매드>
초중반 전개 정말 시원시원하고 인상적이었다. 연재 당시에 질리지 않고 잊지 않고 챙겨본 몇안되었던 웹소설이었던만큼 재미라는 부분에서의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고, 실제로 다시 읽어도 정말 재밌었다.
하지만 결말에서 예상치 못한 씁쓸함을 맛보게 되었는데, 여자주인공 예주가 자신의 힘과 람(남주)의 힘 중 람의 힘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었다면, 주인공이 자신의 힘이 아닌 생판 남의 힘을 믿기로 하는 결말은 날 수가 없다. 어떻게 감히 타인의 힘이 주인공과 어릴때부터 함께해온 힘에 도전하고 승리 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람은 정석대로면 주인공을 각성시키고 주인공이 자신의 힘과 화해하게 만드는 역할에 더 잘어울린다. 강압적이고 무자비하고 강한 초월자이기 때문. 좀 더 주인공에게 친화적이라면 스승 역할 정도를 했을 것이고.
하지만 레드앤매드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기와 타인의 힘에 의존하기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신의 힘을 포기했고, 이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향하는 과정인 것 처럼 그려졌다. 즉 자기 힘을 더 신뢰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의심, 진정한 사랑으로 가기 전의 장애물(?)로 간주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버리는 것이 곧 통과해야할 관문이 되어버렸다.
판타지 로맨스, 혹은 로맨스 판타지 라는 장르에서 남자주인공의 존재가 여자주인공에게 미쳐온 영향을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 소설도 없을 것이다. 남자주인공이 있기에 여자주인공은 지나치게 강한 힘은 가질 수가 없다. 여자주인공의 힘은 때론 강력하지만 불안정하고 주인공을 오히려 위험에 빠트리지만, 남자주인공의 힘은 강력하면서도 안정적이다. 남자주인공의 힘은 완전히 본인의 통제하에 있지만, 여자주인공의 힘은 오히려 그 자신에게 더 두려움의 대상이다.
재밌는건 예주의 힘은 예주에게 천년 후의 세계라는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주었는데 람의 힘은 그 세상을 말그대로 물리적으로 좁혀버리기 까지 한다는 점이다. 남자주인공이 끝도 없이 전능해서 여자주인공의 세상을 부술 수도 있는 절대자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남주의 뒤에 있는 작가가 그것을 허용해 버렸다. 그렇다, 사실 남주는 창조주인 작가를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 것이다. 진짜 여자주인공의 세상을 부술 수 있는 남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기어이 가슴 깊이 느끼게 되면 좀 허무하다.
이 소설에 대해서 미련을 갖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 소설이 보여준 예주의 능력과 천년 후 세계와 거기 살고 있는 신인류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진지하고 독특한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질투하고 집착하는 지리멸렬한 로맨스가 계속되고 있는게 아쉽다. 후반부 들어서서 람이 신인류의 메시아 역할을 너무나 미련없이 던져 버리는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당혹스러웠다. 바로 이전 글에서 리뷰한 '상수리나무 아래' 와는 완전히 반대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신인류와 예주를 치열하게 저울질 하게 되는 과정 정도는 등장해줄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면 로판 남주식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내가 단순히 초반 남주 캐해석을 잘못했던 건지.
로맨스로 분류되는 웹소설 , 웹툰 혹은 드라마 등을 볼 때, 보다 더 넓은 범주의 '좋은 이야기' 라는 속성을 위해 때론 로맨스 문법을 과감히 포기하거나 희생시켜줬으면 하는 작품들을 종종 만난다. 다른 장르에서는 오히려 굉장히 관대하게 해석되는 로맨스가 장르 로맨스라는 딱지만 붙으면 너무 엄격해져서 아쉬울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