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맨틀의 단편집과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몇 년전 여름, 괌으로 여행을 갔다. 바다가 마당에 있는 듯한 호텔방이었다. 여행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고 심지어 둘째날엔 태풍까지 와서 일일 투어를 취소하고 방에만 있어야 했지만, 그랬지만 행운도 있었다. 무료 룸 업그레이드-지금 생각해보면 날씨가 좋지 않아 예약이 널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로 프라이빗 풀이 딸린 아주 비싼 방에서 1박을 묵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독서에 미친 사람들이 한다는 휴가지에서 책읽기를 나도 해보겠다고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힐러리 맨틀의 마거릿 대처 암살 사건이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잘못된 책 선정 같다. 보통 휴가지에 들고 가는 책은 거기에 어울리는 가벼운 소설이나 여행 에세이인것 같은데... 당시에 나는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을 다 읽은지 얼마 안 되었고, 그의 소설이라면 뭐든 냅킨에 휘갈긴 낙서 한 쪼가리라도 읽고 싶어 눈이 벌게져 있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첫번째 단편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슬람 국가에서 살게 된 여자가 이웃의 현지 무슬림 남자와 그 부인에게서 느끼는 오묘한 긴장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낯선 이국 문화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여자. '진보적인' 서양인 (여성)으로서 타국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노골적인 모욕에 바로 대응할 수 없어 느끼는 여성으로서의 무력감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혼란이 주인공 뿐 아니라 그걸 읽는 독자인 내 안에서도 무겁게 소용돌이 쳤다. 어쩔 수 없이 처박힌 이국의 값비싼 방 밖에서 몰아치는 강한 비바람처럼.
어찌됐든 성공적인 독서였다. 나는 그걸 하룻밤 만에 다 읽었다. 문제는 그곳 객실의 오션뷰보다 소설 내용이 더 진하게 뇌리에 남아버렸다는 사실이다.
다음 휴가지엔 어울리는 소설을 읽기로 마음 먹어,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기로 결심했다. 책을 편지 얼마 안됐을땐 무척 만족스러웠다. 여름 별장. 매일 수영을 하고 새로운 남자와 썸을 타는 주인공.. 갑자기 아버지 불륜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아버지의 내연녀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하자 좀 질리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휴양지에서의 일상에 대한 묘사가 빛바래진 않았다.
하지만 결국 소설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독서는 중단되었다. 대신 나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의 생활에 몰입했다. 하얗고 잘생기고 똑똑한 동네 시골개, 엄마 아빠가 해주는 바베큐, 집 앞 마당에서 보이는 초록 산, 아주 좋은 날씨의. 그리고 쨍한 하늘이 때때로 대부분은 가늘고 가끔은 세찬 맑은 빗줄기를 뿌려댔다. 엄마나 아빠를 조르면, 산등성이 사이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리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그러다 그 도깨비 같은 비를 맞고는 했다. 그런 비를 맞으면 굉장히 비현실적인 기분이 된다. 계곡에서 놀다가 누군가 장난으로 끼얹는 물에 맞은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아무 이유없이 재밌고 기분이 좋다.
날씨는 정용준 작가가 에세이 소설만세에서 말한대로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거기 있는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어쩌면 우리에게는 눈앞의 모든 것을 낱낱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아주 화창한 햇살 외에는 그 어떤 절경도 필요치 않은 것 같다.
아니 사실 아닌 것 같다. 가장 최근의 여름에 간 여행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더할나위 없는 날씨와 만났을때 어떤 파괴력을 지니는지 알려주었다. 그때도 책을 가져갔지만 펼쳐 보지도 않았다! 대신 밤마다 잠들기 직전 웹소설을 봤다. 수영을 사랑하는 남자가 나오고 열대 지방에서 휴양을 즐기는 장면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발리에서 일주일에 약간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자동차를 도합 24시간은 타는 정신나간 스케쥴의 여행이었지만 그 정도 지루함 따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여행이었다. 기묘하게 좌우로 철썩거리며 흔들리는 가늘고 긴 배, 어둑한 보라색 바다와 하늘의 일출, 돌고래 떼, 자꾸 들이치는 바닷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던 내 베이지색 가짜 가죽 가방-학교 다닐때 쓰는 아주 일상적인 물건으로 오늘도 쓰고 있다-. 산호초들. 몹시 빠른 배를 타고 한참을 가면 나오는 섬, 절벽, 기이하게 생긴 나무들, 바닷 속 풍경은 말할 것도 없음. 바다를 앞에 둔 절벽 위에서 애들이 탔던 패러글라이딩. 바람이 쌩쌩 부는 절벽 위엔 대기자를 위한 널찍한 다인용 라탄 소재 쇼파가 몇 개 있었다. 거기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바람을 맞으면서, 절벽과 바다와 그 위를 둥둥 날아오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평소엔 잘 하지 않는 대화를 했다.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 말투와 목소리와 친절과 함께.
숲을 끼고 별장 같은 통나무집을 통째로 쓰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숙소. 맑은 날이었지만 순식간에 비가 양동이로 쏟는 물처럼 퍼부어지다가 멎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수영복을 말리려고 밖에 내놨다가 쫄딱 젖었다. 우리가 벗어놓은 신발과 슬리퍼 따위가 문 앞 데크에 어지럽게 헝클어져있었다. 나무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집과 집 앞 데크의 나뭇결이 아름다웠다. 가끔 쏟아지던 비와 그에 질세라 햇빛을 위해 공간을 내주던 하늘이 아름다웠다. 직원들의 말투와 표정이 다정했다.
나는 또 다음 휴가지에도 책을 들고 갈 것이다. 덜 성공적인 독서 경험을 기대하면서. 그래도 역시 글이 아예 없는 여행보다는 있는 여행이 좋다. 이건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