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날에만 느껴지는 감각들이 있다

빗소리, 곱슬머리, 흙내음 같은 것들 | <비>

by 민진킴

규칙적인 듯 들리지만 불규칙적인 소리들이 톡톡 창가를 두드리면, 나는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그 소리를 듣곤 했다. 자연이 내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던데, 빗소리가 딱 그랬다.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그저 그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끊임없이 낙하하던 물방울들의 소리. 박자도 멜로디도 없지만 리듬만은 살아있는 자연의 연주곡.


빗소리를 자각하기 시작하면 들이마시는 공기에 습기가 다분한 것이 느껴진다. 평소 같았으면 곱슬거리고 억세서 사방으로 뻗쳐있는 나의 머리카락들이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지더니 차분하고 부스스하게 가라앉는다. 거울을 보고 부스스한 머리를 빗어내린다. 나는 곱슬거리는 내 머리가 비 오는 날의 습기를 왕창 머금은 그때의 감촉이 좋다.


비 오는 날,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때면 나는 차창에 맺힌 물방울을 눈으로 좇는다. 차가 도로를 내달리면 사선으로 움직이고, 다시 멈춰 서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차창에 꼭 붙어있던 물방울들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면서 주위 물방울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고, 그것들은 점점 커지면서 어느 순간 주르륵 흘러내린다. 주르륵 흘러내린 물방울은 차창에 깨끗하고 작은 길을 하나 만든다. 조그만 물방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창문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부분이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풍경을 잠시 훔쳐본다. 또다시 비가 내리고 차가 달리면 창문은 물방울로 빼곡해진다. 깨끗해졌다가, 흐려졌다가 수없이 반복하는 비 오는 날의 작은 세계.


차에서 내리면 비로소 비가 실재하는 진짜 세상을 마주한다. 비 오는 날 풍경에 안개가 더해지거나, 구름이 많아지면 그 풍경은 한없이 뿌예지지만, 때론 빗방울을 머금은 덕분에 더욱 진해지고 또렷해지는 풍경들도 있다. 나무들과 흙, 콘크리트와 벽돌, 차도와 보도블록 같은 것들. 반대로 물기를 전혀 머금지 못하는 풍경들도 있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도심 속 빌딩숲들, 자동차들로 빼곡한 도로 위 풍경들. 금속이나 유리로 된 풍경들은 물기를 머금지 못하고, 대신 물방울을 매단다.


비 오는 날 나무 밑을 거닐면, 흙내음이 코끝에 훅 들이닥친다. 비가 내리고 촉촉해진 땅과 나무는 이전과는 다른 향을 뿜는다. 평소에는 잘 자각하지 못하다가, 이 순간만큼은 나무들이 살아있다는 게 생생하게 전해지고, 나는 생명의 향을 느끼기 위해 평소보다 더 깊고 긴 호흡을 한다. 최대한 들이마셨다가, 끝까지 내뱉으면 몸속에 습기와 향기가 동시에 들이차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비 오는 날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사를 하고 난 후엔 이전처럼 빗소리를 많이 못 듣게 됐다. 집에 있는 이중창은 생각보다 소음방지에 탁월했고, 침대에 누워 있다 보면 비가 오는지, 얼만큼 오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간혹 도로를 힘차게 내달리는 차도의 마찰음이 달라진 걸 깨달으면, 창문에 얼굴을 갖다 대고 밖을 살핀다. 그러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스스한 앞머리가 착 가라앉으니 눈을 찌를 듯이 다가온다. 그루프로 말아봐도 10분만 지나면 다시 또 축 처진다.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집을 나선다. 비가 오는 출근길은 다른 날보다 더 북적인다. 미처 마르지 않은 누군가의 우산이 내 옷에 닿고, 우산 끝에서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들이 실내를 더럽힌다. 신발 틈새로 들어오는 빗물이, 젖어버린 바지 끝단이, 미끌미끌한 우산 손잡이가 모두 나를 찝찝하게 만든다.



곧 있으면 장마가 시작될 것이고 나는 어김없이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맡길 것이고, 상쾌함보다는 불쾌함과 찝찝함을 먼저 떠안고 하루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찝찝함과 불쾌함은 잠시 제쳐두고 비 오는 날 느낄 수 있었던 그 감각들을 다시 느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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