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진킴 Mar 21. 2022

약속이 취소되길 바라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약속>

MBTI가 보편화 되며 생긴 좋은 점은, 이전엔 이해받을 수 없었던 행동들도 MBTI라는 이름표를 붙이면 어느정도 이해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들어,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 대신 '왜 힘든지' 묻는다면 그건 T와 F의 차이이지, 공감능력 부족이 아니라는 말이다.


약속의 문제도 비슷한 화두로 떠올랐다. 한 때 '약속이 취소되면 속으로 엄청 기뻐하는 MBTI 유형'이라는 주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 (대부분 내향형의 인간들, P형 인간들)이 약속이 취소되면 기뻐했다.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 같은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어!


사실, 이전까진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약속을 앞두고 꺼낼 수 있는 말도 아니었고, 혹여나 친구가 마음 상할까봐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약속이라는 건 지켜야 하는거지, 취소해선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이 취소되길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과, 진짜로 파투내버리는 건 다른 문제다. 나는 그저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즐기고 싶은거지, 예의없는 사람이 되고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묻는다. 보고싶다면서 약속을 잡아놓고 왜 취소되길 바라는거야? 그럼 애초에 약속을 안 잡으면 되잖아? 보고 싶은 마음과 약속이 취소되길 바라는 마음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친구가 보고 싶은것도 맞고, 약속이 취소되길 바라는 것도 맞다. 친구와 만나서 놀고 싶기도 한데, 혼자 있고 싶기도 하다. 아마 이런 심리는 내향형이 더 클수록 양가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마치 나처럼.


내향적인 인간인 나는 친분의 깊이나 여부와 관계없이 사람을 만나는 데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물론 만나면 즐겁다. 그간 못나눴던 이야기들로 신이 난다. 막상 나가면 언제 그런 마음이 들었냐는 듯 잘 놀곤 한다. 하지만 집으로 귀가하는 길,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만나고 오면 힘이 쪽 빠진다. 


그래서 매번 고민하는 것이다. 약속에 나갔다오면 기진맥진 할 내 모습을 알아서. 혼자 있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니까, 내심 바래보는 것이다. 아, 약속이 취소되면 좋겠다- 하고. 그러니 내가 친구를 보러 간다는 건, 후에 기진맥진 할 나보다 그 친구를 더 아낀다는 뜻이기도 하다. 힘들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싶은 마음이 더 컸다는 말이다. 나에게 약속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말이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재밌게도 이번 주 토요일에도 약속이 있다. 바로 이 글을 함께 쓰는 친구들과의 약속이다. 더 재밌는 건 셋 모두 I라서 셋 모두 약속이 취소되길 내심 바라고 있을거라는거다. 그래도 만나게 될 걸 안다. 만나면 맛있는 걸 먹을 거라는 것도 안다. 이런 마음을 다 알고 이렇게나 꾸준히 만나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도 너를 생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