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지켜야 할 약속이 많아진다. 그것이 암묵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식사를 하면 그릇을 물에 담가 놓거나, 입은 옷은 옷걸이에 걸어 놓고, 양말을 뒤집어 벗지 않는다거나 치약 주둥이를 항상 깨끗하게 쓴다든지 하는 일상생활의 작은 약속들로 시작해서 거짓말하지 않기, 시간 지키기처럼 오랜 시간의 신뢰를 만드는 약속들까지. 단둘의 관계일지라도, 쌓아온 이야기와 지켜온 약속들을 들여다보면 끝이 없다.
집을 나서서 골목으로 나가면 가끔씩 굴러다니는 쓰레기가 보이기는 하지만 길거리는 깨끗한 편이다. 모두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강아지들은 목줄을 매고 산책을 한다. 분리수거장에는 종류별로 쓰레기가 모여 있다. 횡단보도는 초록 불이 되어야 사람이 건너고, 자동차는 오른쪽 차선으로 달린다. 지하철 열차 칸에는 한 자리에 한 명의 사람이 앉는다. 혼자만의 방을 나가기 시작하자마자 지켜야 할 약속이 참 많이도 생긴다.
이 모든 게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은 모두가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런 약속들이 있기에 사람을 가지고 셈을 헤아리면 1+1이 2가 아니라 100이 된다. 한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수많은 순간에는 그만큼 많은 약속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당장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만 해도 2명보다는 훨씬 많으니, 세상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약속들과 약속을 해석해 행동하는 사람들만으로도 무궁히 다양해진다.
약속이 아주 엄격해져서 이름을 내걸고 지켜야 하는 정도가 되면 우리는 그걸 법이나 계약이라고 부른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사회는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제삼자의 역할을 만들어 놓았다.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약속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너무 다르니 지금 우리가 따르고 있는 약속들은 말이 안 되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사회가 만든 약속을 따르며 이것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여러 명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물론 기대되고 얼른 다가왔으면 하는, 두근거리는 약속도 있지만 정말 지키기 싫은 약속, 지키든 지키지 않든 크게 이익도 불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약속들도 있다. 내 당장의 밥그릇이나 여흥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약속들 모두 지켜 가며 살기에는 하루가 너무 피곤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얼까. 내가 받고 싶으니 너도 이렇게 해 주었으면 싶은 보상심리도 있겠지만,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도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것밖에 할 수 없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약속을 소중히 하는 이들을 소중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