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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Mar 21. 2022

달갑지 않은 약속을 잡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약속>

다음은 최근 약속에 관하여 지인들과 나눴던 대화의 일부를 기록한 내용이다. 동생(P, 즉흥적)은 나(J, 계획적)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물었다.


동생 : 언니. 언니는 그럼 갑자기 잡히는 약속들이 싫어? 막 당일날 잡히는 약속.
나 : 갑자기? 싫지. 나는 약속을 미리 잡아줬으면 좋겠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동생 : 헤엑. 뭔 마음의 준비. 나는 미리 약속을 잡아두면 계속 그 약속을 신경 써야 해서 싫어. 그럼 언니는 미리 얘기해줘야 하는 거지? 그럼 하루 전?
나 : 에? 하루 전이 어떻게 미리야? 나는 하루 전에 물어보면 보통 시간이 안 돼. 이미 뭘 할지가 다 정해져 있다고!


동생은 그럼 얼마나 전에 미리 정하는 것이냐 물었고, 나는 일주일 전에는 정해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나는 급작스러운 약속이 보통은 부담스러웠고, 실제로 일주일 전이면 그 주의 저녁 일정들이 모두 정해져 있기도 했다. 운동을 가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아님 해야 할 일이 있거나. 갑작스러운 연락에 나는 보통은 거절의 말을 전해야 했다.



하지만 동생은 나와 달랐다. 갑자기 생기는 약속에 응할 수 있도록 오히려 시간을 빼놓는다고 이야기했고, 약속이 저 멀리 잡힐 때면 점점 다가오는 약속에 대한 부담이 생긴다고도 했다. 할 일이 밀리는 것이 싫은 것처럼, 약속이 멀리 빽빽하게 잡히는 것이 마치 숙제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하고 난 이해했다.


동생 : 그러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 해?
나 : 글쎄. 그러면 보통은 늦게 답장을 하지 않을까? 약속을 잡자는 말에 한나절이 지나서야 답을 하면서 대화를 질질 끌던지? 그냥 그렇게 마무리했던 것 같긴 한데, 최근엔 약속을 잡고 싶지 않은 친구랑은 아예 멀어져 버려서 그럴 일이 없었어.


매일 얼굴을 마주쳐야만 했던 학창 시절과 대학교 때와는 다르게, 서로가 약속을 잡아야 만날 수 있는 직장인이 되자 나의 인간관계는 급격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대규모로 열리던 행사들에서 벗어나, 이제 정말 순수하게 호감이 있는 상대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만 만날 수 있는 약속이 성사되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친구들에게 동생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너네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 해?


친구 A : 나는 날 만나고 싶다고 하면, 언제냐고 물어보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시간에 선약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 같아. 이번 주 주말 시간이 되냐고 물어오면, 이미 선약이 있다고 답해. 다음 주, 다음 달, 모두 선약이 있다고 답할 것 같은데.
친구 B : 나는 정확한 시간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애매하게 답하는 거지. 예를 들면, 날이 조금 더 선선해지면 보자. 날이 좀 풀리면 보자. 이런 식으로? 그럼 결국 흐지부지 되는 셈이지.


돌아보니 나의 방법도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약속은 시간을 정확히 잡으려고 하지 않고 어떤 핑계를 대서든 기분이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애매하게 답한다. 약속을 가지기 싫은 것이지, 인간관계를 단절 내고 싶은 생각은 또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이 곧이곧대로 가능한 시간을 기다리는 눈치 없고 끈질기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꽤 곤란해질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나는 '생각해 볼게'라는 대답으로 넌지시 거절의 말을 전하는 사람의 답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텐데'라는 스스로에 대한 우려가 들기도 했다. '예' 혹은 '아니오'로 요약되지 않는 약속의 단어들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어려워진다고, 홀로 결론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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