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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킴 Apr 26. 2023

내리쬐는 햇빛이 좋아졌다

<햇빛>

01. 여행의 필수품

얼마 전 유럽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이라 왠지 모르게 더 들떴다. 하지만 3월의 한국이 제법 따뜻했던 것과 달리 유럽은 생각보다 추웠고, 맑은 날은 거의 없었다. 흐리고 추운 날씨가 이어지자, 자연스레 옷차림은 무거워졌고 몸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여행이 재미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는 여행하는 걸 꽤 즐겼던 것 같은데, 내가 변한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없는 여행의 원인은 날씨에 있었다. 리스본에 도착해 눈부신 햇빛을 맞이하는 그 순간, 드디어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간 좋았던 여행지를 되돌아보면 늘 내리쬐는 햇살이 함께였다. 바르셀로나와 세비야, 시드니와 멜버른, 그리고 리스본과 포르투까지. 눈을 부시게 하는 적당한 빛은 모든 색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었고 주변의 공기마저 따뜻하게 데웠다. 여유로움, 따뜻한, 선명한 색깔이 찰나에 공존할 때, 그 풍경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새겨진다.



02. 빛이 드는 집

전에 살던 집엔 큰 통창이 있었고, 창을 따라 침대가 놓여있었다. 아침 햇살이 강렬해 질 때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깨닫는다. 쏟아지는 빛이 좋아 얇은 커튼을 달았더니 여름엔 들이치는 햇빛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얼굴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게 느껴지면 조금이라도 그늘진 곳을 찾기 위해 침대 구석으로 몸을 붙이고, 그래도 안되면 이불을 덮어쓴다. 하지만 점점 따뜻해지는 방 안 공기 때문에 오래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누워있기를 포기하고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면 얇은 커튼의 패턴이 그대로 이불에 비쳐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 같은 것도 함께 눈에 띈다. 느릿하고 따뜻한 아침의 나날들이 좋았다.


이사를 오면서 통창은 사라졌고 침대를 창 쪽이 아니라 벽쪽으로 놓은 탓에 아침에 햇빛이 드는 일은 이제 없다. 대신 베란다가 생겼고, 오전 내내 쏟아지는 햇빛으로 인해 걸어놓은 빨래에선 햇빛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 쨍한 빛을 빨래 말리는 데만 쓰는 건 어딘가 아쉬워서 얼마전엔 작은 올리브 나무를 한 그루 들였다. 햇빛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하니 무럭무럭 자라길 바란다. 올리브 나무를 잘 기르는 데 성공하면 다른 친구들도 만들어 줄 생각이다. 이번 집은 햇살과 초록이 함께하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03. 가까이 할 수 없는 

언젠가부터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만 볼 수 있는 선명한 세상들이 좋아져서 왠지 여름이 기대가 되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더이상 햇빛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어릴 땐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강렬한 햇빛을 받으면 피부가 가렵고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병원에 갔더니 햇빛 알러지 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제야 햇빛이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것을 제 때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여름엔 장마가 길다고 하던데. 몸에 두드러기가 나도 좋으니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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