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보다는 '노르웨이의 숲'

by 민진킴

-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건 중학교 때였다. 1Q84를 처음 읽고서 그 두꺼운 책 3권을 모조리,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사실 책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하루키 소설 중 가장 인기있다고 할만한 상실의 시대, 즉 노르웨이의 숲을 읽게 되었다.


-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상실의 시대'라는 책 제목이 맘에 들었다. 상실의 시대. 뭔가 많은 것을 내포할 것만 같은 철학적인 제목이다. 노르웨이의 숲 이라고 하면 왠지 노르웨이에 있는 넓디넓은 침엽수림이 떠오르고 책 내용도 뭔지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나는 비틀즈 세대가 아니기에) '노르웨이의 숲' 보다는 '상실의 시대'가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막연히.

- 하지만 틀렸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보다는 '노르웨이의 숲'이 훨씬, 아주 많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책을 다 읽고 나서 사실 멍했다. 등장인물들이 너무나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막연히 표현했던 그런 감정, 생각들을 등장인물들을 이용해서 사람으로 잘 빚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은 잘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들의 상상력을 반감시킨 단어라고 생각했다. '상실'의 시대라고 하면 꼭 무언가 상실함을 뜻하는것 같지 않은가. 누군가는 상실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보다는 노르웨이의 숲이 더 좋았다.

- 노르웨이의 숲. 그 제목을 들으면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숲길을 거닐던 모습도 떠오르고, (멜로디가 떠오르진 않지만) 레이코씨가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 떠오르기도 하고, 와타나베가 근무했던 레코드샵이 떠오르기도 한다.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제목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의 감정들도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멈추고 싶었다. 다른 평론가들처럼 애써 이 책을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고, (물론 궁금하긴 하지만) 책의 의미나 복선 등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그들의 감정들을 그냥 그대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게 되는 순간 그런 감정들은 사라지고 말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