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이 책을 읽은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은 후 받은 충격은 상당했고 내가 받은 신선한 충격을 기록하고자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 나는 1년이 넘게 그 글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과연 타인의 우울감에 대해 써 내려가는 것이 옳은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득문득 끝맺어지지 못한 이 글이 떠올랐지만, 항상 나는 혼란스러웠다. 혹여나 내가 가볍게 쓴 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특히 '우울증' 때문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볼 때마다 이 생각은 더욱 깊이 나를 파고들었다.
우울함이 예술이 된다면, 그건 어떻게 소비해야 맞는 걸까.
사실 정확한 답은 잘 모르겠다. 정확한 답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제 이 책을 읽은 뒤로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머릿속에서 날뛰던 생각들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차분해졌고, 글로 풀어낼 정도로 꽤 정리되었다. 이 글은 2018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우울에 대한 기록이다.
최근 공감을 바탕으로 한 많은 에세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것이 제법 인기가 많아서 서점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에세이에 별 관심이 없다. 결국은 내가 '겪어봤던 혹은 겪을 수도'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상의 범위에서 느껴볼 법한 책들에 별 흥미가 없다. 내가 책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새로운 감정, 새로운 지식, 새로운 세계 등 내가 여태껏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읽어나가는 것이 정말 즐겁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실격'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책이었다.
내가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겨울,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세상을 떠났다. 내 학창 시절 한 켠을 자리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떠났다고 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원인은 우울증. 내 머릿속엔 내내 물음표 투성이었다.
이때부터 사람의 우울감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나로서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 많았다. 물음표만 가득 안은채 '인간실격'을 읽게 되었고, 우울이란 감정의 폭이 얼마나 크고 다양한 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의 활자는 우울감 그 자체가 되어 나에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나는 머릿속의 물음표를 조금씩 지워갈 수 있었다.
다양한 의미에서 '인간실격'은 엄청났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친구가 생일날 케이크를 사주었을 때, 뜻하지 않은 이벤트에 당첨되었을 때, 무사히 막차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을 때 등 그 상황마다 느끼는 감정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기쁨'이라는 연장선에 있는 감동, 환희, 즐거움, 뿌듯함, 재미, 신남 등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기쁨'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우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인간실격에서 보게 된 그 우울감은 감히 내가 가늠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나는 여태껏 우울함의 정도가 0부터 10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는 -100부터 100까지의 우울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울할 때 조그만 땅굴을 파놓고, 그곳에 도망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지하 밑의 거대한 공간을 창조하여 우울함을 모두 모아둔 것 같았다. 공감을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나는 그 우울의 극히 일부만 느낄 수 있는 거니까.
책을 읽는 내내 그 '풍부한 우울감'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사람의 우울에 관해 끝없이 써 내려간 이 책은, 내 안에 있던 또 하나의 창을 열었다. 그 창을 열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책을 읽고 나는 이 책이 '재밌다'라고 생각했다. 좋은 작품이고,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었다.
하지만 조금 뒤, 이 책을 '재밌다'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역겨워졌다. 이 책은 자전적인 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작품 속 인물은 작가의 일부라는 말이 된다. 타인의 우울을 보고 재밌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소설의 형태이었다 한들, 그것은 본인의 일부였을텐데 나는 어떤 감정을 가져야 맞는 걸까?
예전부터 많은 아티스트들이 '우울'을 소재로 작업을 했다. 자신의 우울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세상에 내놓기로 결정한 건 그들이다. 그들의 손을 떠난 작품의 해석은 감상자에게 달려있겠지만, 감상이라는 명분 아래에 어디까지 떠들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에 가까웠다. 나는 늘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감정이 넘치는 편보단 부족한 편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 또래 아티스트들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