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친구가 나에게 말하듯 가벼운 말투에 책장은 탄력을 받아 더 빠르게 넘어갔다. 우리 주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들, 그래서 책의 내용에 공감은 하나 새로운 점은 딱히 없었다. 한국에 살면서 부모가 잘나지도 않고 얼굴이 예쁘지도 않고 엄청나게 똑똑하지도 않은 평범한 주인공이, 한국에서 더 이상 살 수는 없다고 느끼고 한국을 떠나려 한다. '한국이 싫어서' 말이다.
주인공 계나는 호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호주로 출국할 때 행복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왜 행복하지 못했는지,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한 지 말이다.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하더라고. 내가 왜 한국에서 살면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주인공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 작은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덮으려 하는데, 내 마음속에 찐득하게 남아 이 책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건 마지막 해설부분이었다.
한국에서 출국해 호주로 귀국하며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한다. 이쯤에서 계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 문학평론가 허희
아니야. 이 말은 틀렸다.
적어도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해질 수 있는지 깨달은 거라면 앞으로 행복해질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비겁한 행동이지만, 남과 비교해 내 행복의 우위를 점치려는 마음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의 가성비를 점치며 계산한다. 때문에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가성비를 따져보며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일은 꽤 중요한 일이며 당연한 본능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깨달음이 아닐까.
마지막 그 해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온 힘을 다해 계나를 변호하고 싶었다.
내가 계나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도 아니고, 계나의 이야기에 공감을 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이토록 계나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는 건 남의 행복을 앞에 두고 '불행'을 점치는 그 문장이 정말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남의 행복을 단정 지을 수 없다. 행복을 바라는 사람에게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그냥 그 사람이 행복하길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책 뒤에 이런 해설을 넣은 이유가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봤지만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구구절절 내 생각을 써내고 싶었다. 어딘가에서 이 책을 읽고 있을 또 다른 계나가 그 문장을 읽고 좌절감을 떠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계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다.
행복해져라, 아니 행복해질 거야 계나야. 반드시.
나에게 거는 최면과도 비슷한 그 말을 자꾸만 되뇌게 된다.
행복을 위해 싸우고 있는 모두가 진심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