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전화에 얽힌 나의 기억 조각들
문자 vs 전화로 묻는다면 나는 무조건 문자인편이다. 넘쳐나는 생각과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나는 텍스트로 옮기는 걸 훨씬 편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주위에 통화를 1-2시간씩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하고 또 누군가와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번 글의 주제를 '전화'로 정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전화. 내게 썩 반가운 존재는 아닌데. 전화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함께 건져 올려진 불순물들을 탁탁 털어내고 나자 그래도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남았다.
# 1. 후-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이얼 하나하나를 누른다. 꼬불꼬불한 전화선을 이리저리 꼬아댄다. 잠깐의 통화음, 이내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친구의 어머니다. "안녕하세요, 저 민진인데요. ㅇㅇ이 집에 있나요? 네. 같이 놀자고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어른들에게 그런 말을 전하는 걸 자못 어려워했다. 친구가 받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늘 수화기를 드는 건 친구의 부모님들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보러 가는 길, 어딘가 힘이 쪽 하고 빠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 2. 1m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박스 안, 남은 동전들을 털어 넣고 은색의 다이얼을 꾹꾹 누른다. 신호음이 울린 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0초. 그동안 나는 내 상황을 모두 전해야 했다. 달칵. "엄마, 나 학원 끝나고 친구 집에서 놀다 갈게!"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뒷말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가 놀고 간다는 말을 다 전했으니 그걸로 끝이다.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집에 꼬불꼬불한 유선 전화기 한 대씩은 다 있었고 공중전화를 꽤 자주 사용했으며 공중전화에 넣을 동전 좀 아껴보겠다고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곤 했다. 지금 태어난 친구들은 아이폰의 전화 아이콘이 왜 앞뒤로 볼록한 모양인 지, 전화기에 선은 왜 달려 있는 것인지, 전화할 시간이 10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겠지만.
전화기 케이블을 베베 꼬아대던 기억이 생각보다 생생한데 전화가 이렇게 구시대적 유물이 되어버릴 줄이야. 흘러버린 시간이 새삼스럽다.
#3. "응, 할머니. 저 민진이요. 서울 춥냐고? 응. 많이 춥지. 할머니는 안 추워요?"
올해로 팔십하고도 다섯이 된 할머니에겐 오직 전화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할머니와 카톡은 물론, 문자조차 나누어본 적이 없다.
화면이 지금 스마트폰의 반이나 될까 싶은 할머니의 자그마한 폴더폰. 그 전화기 속엔 단축번호 몇 개 만이 저장되어 있다. 아빠, 엄마, 그리고 할머니의 동생들. 그 단축번호 몇 가지 속에 손녀인 내 번호는 없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 문자도 안 되고 영상통화도 당연히 안된다. 오로지 내가 먼저 거는 전화만이 할머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닥 반갑지 않았던 '전화'라는 존재가 나에겐 one of them이지만 할머니에겐 one and only인 셈이다. 문자, 전화, 메일, 각종 메신저 등을 통해 쉬지 않고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이 세상에서, 할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건 일방통행의 전화뿐이라니. 애써 밀쳐내었던 전화의 존재가 다시금 내게 훅 다가온다. 그 옛날 전화 케이블을 팽팽하게 쭈욱 늘였다 다시 놓은 것처럼.
#4. "침대에 누웠어. 아직 안 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스마트폰의 화면. 그 조그만 기계를 매개체로 주고받는 우리만의 소리들. 얼굴은 안 보이지만 목소리는 들리고, 글이라는 활자로 남지 않지만 소리는 귓가에 맴돈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편지보다는 가볍고,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대화보다는 조금 무겁다. 얼굴에 나타나는 비언어적 표현들을 감지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서로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 내뱉는 소리의 길이, 음의 높낮이, 말의 빠르기를 섬세하게 듣게 된다. 가만 생각하면 어딘가 은근한 구석이 있다.
너와 나 사이를 오고 갔던 소리들은 금세 휘발되어 사라지지만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은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서로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 기울였던 밤. 나지막한 숨소리마저 귀에 콕콕 박혔던 밤이었다.
"얼굴은 안 나오고 목소리만 나온다고요? 그럴 거면 그냥 메시지 하는 게 낫지 않아요?"
먼 훗날 아이들에게 '전화'에 대해 설명하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아이폰 속 전화 아이콘도 구시대적 유물이 되어버린 지금, 이런 말을 들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때가 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줘야지. "너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 걸 말해줬는지 모르지? 목소리로만 대화하는 건 또 다른 매력이 있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