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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Oct 01. 2022

나를 살게 하는 시간

동네 고양이들 앞에서 나의 쓸모를 찾곤 했다

오늘도 간식을 종류별로 주섬주섬 담아 가방을 꾸린다. 양말이 줄 닭 가슴살, 지니 줄 북어 트릿, 시리가 좋아하는 캔까지. 다들 어찌나 취향이 확고한지 처음 고양이들 밥을 챙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간식 종류가 이렇게나 늘어날 줄은 몰랐다. 여기에 사료와 물, 비상용 항생제를 넣고 매일 저녁 동네를 돌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쭈그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그릇을 대령하다 보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집에 도착하면 밤 열 시가 넘지만 어쩌다 보니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내일 만은 고양이 밥 좀 대충 주고 일찍 들어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음 날이면 또 나를 보고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고양이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 가방 안에서 뭐라도 꺼낸다.


우리 아파트에는 열 마리 넘는 고양이들이 지내고 있고 밥 먹으러 들락거리는 고양이까지 합하면 무려 열다섯 마리쯤이다. 나는 이곳을 냥파트(고양이 아파트)라고 부른다. 오랜 기간 동안 고양이들을 돌봐오신 주민 분이 계신 덕분에 급식소 밥자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고, 심지어 여기서 10년 정도를 지낸 장수 고양이들도 있다.


동네 고양이를 만나러 가는 일은 내가 매일 하는 유일한 행위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자동적으로 가방을 꾸리는 게 습관이 되었고, 그들은 내게 고양이라는 일반 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로 존재한다. 그러니 쫄쫄이가 무사한지, 예쁜이가 나를 기다리진 않을지 걱정되는 것이다. 지난 일 년간 슬럼프에 빠져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고양이 밥 주기는 빼먹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다가도 내가 주는 음식을 허겁지겁 받아먹는 고양이들을 보면 드디어 나의 쓸모를 찾은 것 같았다.  


게다가 고양이들은 불평을 몰랐다.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는 자동차를 그늘 삼고, 영하의 날씨에는 친구들과 붙어 체온을 나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예쁜이는 하얀 털이 젖어가면서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물이 없으면 고인 빗물을 할짝거리고, 버려진 박스를 방석 삼아 앉아 쉰다. 장난감이 없는 아기 고양이들은 쓰레기 비닐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논다. 매 순간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 길 위의 생활이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 나름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고양이들을 볼 때면 매번 정신을 퍼뜩 차리게 됐다. 몸이 성치 않은 고양이들은 또 어떤지. 구내염으로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먹지 못 하면서도 나를 보면 꼬리를 살랑거리는 지니를 볼 때면 그저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간절히 소중해졌다.


하루 사료 한 줌, 물 한 모금만 있어도 다행인 게 길고양이의 사정이라 허름한 박스 집도, 몸을 숨길 수 있는 풀숲도, 한 뼘 남짓 허락된 사료 그릇 자리도 감지덕지다. 이런 고양이들의 삶의 풍경은 곧바로 나를 생활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매달 꼬박꼬박 드는 사료값과 간식값에, 겨울 집이나 해충 방지용 신기패 같은 자잘한 용품들도 정기적으로 구비해야 한다.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약값도 만만치 않다. 감당해야 할 비용을 계산하고 나면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멍하던 머릿속은 생존의 감각으로 명확해진다. 이 시간만 되면 나는 좀 잘 살아보고 싶어졌다. 언젠가는 넓은 단독 주택에서 눈치 보지 않고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돈 걱정 없이 아픈 고양이들을 치료해주고 싶다. 그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지금 주는 사료보다 질 좋은 사료라도 마음껏 먹이고 싶다.


언젠가 <철학의 슬픔>에서 만났던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 가족이,  이웃이,  나라가 중요하지만, 그렇게  것만 찾아서는  이상 자신조차 지탱하기 어려운 단계들이 있는 법이다. 자기 중심성을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것은 아주 취약한 처지에나 어울리는 삶의 태도라  만하다.' 정말로 취약한 존재의 생존 문제 앞에서 나의 괴로움은 사소해지고 만다. 더 큰 고통 앞에서 나의 고통을 요만큼 작게 만들고 나면 비로소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게는 쾌적한 잠자리가 있고 풍족한 음식이 있는데  정도 수고는   있지 않나, 가 됐든 조금 힘들어도 참을 만하지 않나. 

 

매일 한 시간씩 고양이들을 만나는 시간은 나는 살게 하는 시간이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가도 밥 가방을 들고 걸음을 재촉하고, 더러워진 그릇을 닦고, 바닥에 떨어진 사료를 쓸고, 민달팽이를 맨손으로 치우면서 내게 이런 기력이 있었나 놀라곤 한다. 돌봄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작용이 될 수도 있다. 돌보는 행위 그 자체로 나는 나를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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