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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Oct 30. 2022

캣맘인지 새맘인지

고양이 급식소엔 별 일이 다 일어나지만 이제는 하다 하다 비둘기까지 오는 걸 보고 헛웃음이 났다. 비둘기 두 마리는 항상 비슷한 시간이면 사료를 먹으러 아파트 뒷마당에 나타난다.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같이 다니는 게 아마 혈연관계일까. 아니면 같이 밥을 먹기 위한 전략적 파트너인가. 아무튼 내가 사료 그릇에 사료를 붓고 있으면 걔네들은 어디선가 날아와 내 주위를 서성거리며 걸어 다닌다. 저기 밥이 채워질 걸 안다는 듯 눈치를 보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내가 사라지면 곧장 밥그릇으로 가서 부리로 사료를 콕콕 쪼아 먹는다. 이뿐만 아니다. 근처 나무를 찾아오는 까마귀 또한 고양이 사료를 노린다. 나무 아래 숨겨둔 사료그릇이 매번 엎질러져 있어 또 누가 이러나 싶어 별 걱정을 다 했는데 알고 보니 까마귀의 소행이었다. 까마귀는 부리로 그릇을 엎은 후 사료를 먹을 만큼 영리했다.

   

처음에는 고양이 사료를 빼앗는 게 괘씸해서 비둘기를 쫓아냈다. 나무 아래 밥그릇은 벽돌에 꽁꽁 묶어 까마귀가 건드리지 못하게 해 뒀다. 그러나 비둘기는 쫓아낸다고 해서 안 오는 애들이 아니었고, 똑똑한데 힘까지 센 까마귀는 기어이 그릇을 엎어놨다. 새들과의 기싸움은 금세 포기였다. 고양이만 밥 먹으라는 법도 없지. 새들도 도시에서 마땅히 먹고 살 게 없을 터였다. 그 후론 다 같이 먹어라 싶어 사료를 그냥 뒀다. 마음을 바꿔 먹고 나니 밥 기다리며 서성이는 비둘기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개나 고양이는 인간과 친근한 동물이라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상하는 게 쉽지만 비둘기의 감정을 상상하자니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 비둘기에게도 다 (먹으려는) 계획이 있어 보인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조류 혐오를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비둘기가 한 번 날 때 온갖 병균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이야기 때문에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면 자동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던 해 갔던 유럽 여행에서 본 모습은 충격이었다. 파리를 비롯해 유럽 도시의 사람들은 비둘기를 유난스럽게 쫓아내지 않았다. 음식점 테라스에서 발밑에 아무리 비둘기가 돌아다녀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그걸 본 후론 유난을 떨면 이목이 집중될까 봐,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게 세련된 행동인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얼어붙은 채로 꿋꿋하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동네 고양이들을 돌본 후로 쫓아내는 행위는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얼마 전 바닷가에 갈매기 떼를 보고 달려가서 우르르 날려 보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저 놀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갈매기는 전혀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쉬고 있는 고양이에게 뒤에서 몰래 다가가 겁에 질리게 만들던 사람들, 웃으며 고양이 뒤를 쫓아가던 사람의 모습이 겹쳤다. 단지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혹은 재미로 다른 생명에게 위협을 가하는 모습을 단지 철없다고 하기에 그들은 모두 지긋하게 나이가 든 성인들이었다(?).  

      

고양이나 비둘기나 그들의 생태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가만히 지켜보면 먹고살려고 애쓰는 것들은 다 나름대로 기특해 보인다. 한쪽 발을 잃고 지하철 계단에서 옴짝달싹 못 하거나 비 오는 날 건물 아래에서 가만히 비를 피하던 비둘기의 모습을 종종 본다. 살아있는 것은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기본적으로 힘든 일이다. 리베카 솔닛은 어떤 감정은 배워야만 하며, '내 안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신경처럼 감정이입, 연대, 지지 같은 것이 자아를 신체의 경계 너머로 확장해 준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타자를 향한 작은 상상력을 통해서만 나의 세상은 확장될 수 있다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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