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고양이들에게 관심을 막 가지기 시작했을 무렵, 선배 캣맘 어르신의 능숙한 솜씨와 능숙한 감정 처리에 감탄하곤 했다. 솜씨라는 말을 쓰기엔 좀 그렇지만 그 솜씨란 새끼 고양이의 사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솜씨였고, 폭우에도 아랑곳없이 우산을 받쳐 들고 밥을 주는 태연함이었다. 고양이 사체를 대할 때도, 천재지변 앞에서도 10년 차 선배님은 “아휴 불쌍해서 어떡해.” 하면서도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목표 지향적으로 움직였다. 도대체 이런 일은 몇 번이나 겪어야 저렇게 단단해질 수 있을까. 선배 캣맘 어르신의 손으로 먹이고 직접 묻어준 고양이는 셀 수 없이 많다고 들었다. 동네 고양이 돌봄 3년 차가 되니 나도 이제는 웬만한 일로는 호들갑 정도는 떨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추위가 시작되자 아파트 고양이를 보고 걱정하는 주민에게 “얘네 생각보다 강해요. 똑똑해서 알아서 따뜻한 곳 찾아 숨고, 지난겨울도 잘 견뎠어요.” 하고 덤덤히 말했다. 그렇다고 감정의 동요가 없는 건 아니다. 매일 밤낮으로 기온을 체크하며 걱정을 하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전전긍긍하며 마치 내 몸이 아픈 듯 심하게 감정이입을 하진 않게 되었다.
초반 일 년 동안은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잘 있는지 걱정이 되어 하루에 두세 번씩 보러 가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겨울에 따뜻한 온수 매트에 들어갈 때도 ‘우리 고양이들은...’ 하며 청승을 떨었다. 그러다 매일 보이던 고양이가 하루라도 안 보이면 내려앉은 가슴으로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고, 비 오는 밤에는 우산을 씌워주고 서 있기도 했다. 내가 얼른 사라져야 고양이들도 비를 피하러 들어가는데 그땐 그런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이별하는 심정이었고, 언젠가 정말로 이별하는 날이 오게 되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하다 쓸데없이 혼자 아파하기도 했다. 그만큼 애정을 쏟다 보니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게다가 당시에 아픈 고양이 노랑이를 돌보던 중이라 자주 우울해졌고, 나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늘 마음 한 편이 답답했다.
그러던 중 나만 졸졸 쫓아다니던, 미약한 생명을 겨우 붙들고 있던 고양이 노랑이가 별이 되었다. 붙잡고 약을 먹이면서도, 온갖 캔을 따 줄 때도 매번 상상했던 일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마지막에 병원에 못 데려간 일, 더 많이 쓰다듬어주지 못한 일, 가족으로 거둬주지 못한 것까지 모두 자책했다. 살리지도 못할 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모순적이게도 또다시 다른 고양이들에게 음식을 주는 순간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떠나간 노랑이 대신 사료를 맛있게 먹는 고양이를 보면 그때만큼은 마음이 좋았다. 순간 어렴풋이 예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러 다니게 될 것 같다고. 한동안 의무감이나 동정심에 가려져있던, 동네 고양이들을 만나 교감하는 그 순간 자체의 행복을 다시금 상기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고양이를 잃게 될 때마다 계속 자책한다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고양이들을 거두고 먹여야 스스로를 탓하지 않을 일이었다.
동네 고양이 돌봄 활동은 이 정도 힘쯤은 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떠안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도 않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할 때 비로소 돌봄 활동은 지속 가능해진다. 지니에게 구내염 수술을 시켜준 후 원래 자리에 방사해야만 했을 때도 거둬주지 못하는 내 상황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그러나 해줄 수 없는 일로 계속 감정을 소모하다가는 이 일에 완전히 지쳐버릴 것 같았다. 돌봄 활동은 하면 할수록 끝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라 최대한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야만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집고양이에게 하듯 모든 걸 완전무결하게 해 줄 수는 없다고 내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겐 이 일이 거창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내가 하는 일들은 모두 완벽하지 못하다. 바쁘면 대충 사료만 부어놓고 오기도 하고, 중성화 포획에 실패하면 몇 번씩 출산하는 고양이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도 있다. 고양이를 위한 최선의 판단이 뭔지는 매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완전무결하지 않은 나를 인정하기에 무리 없이 그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다.
고양이들은 자신의 안전을 찾아 언제든 자리를 옮기고, 때론 모험을 떠나기도 한다. 전에는 나와 가장 친한 고양이 쫄쫄이가 매일 보이던 뒤뜰에서 안 보일 때마다 불안했다면, 이제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 하듯 늘 내 눈앞에 있기만을 바랄 순 없다고 마음을 다스린다. 대신 쫄쫄이의 야생의 감각을 믿어보기로 한다. 강력한 태풍이 지나가고도 지하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고, 인간의 눈으로는 아무리 둘러봐도 숨을 만한 곳이 없는데도 귀신같이 몸을 숨길 줄 아니까. 깨끗한 먹이와 적당히 무관심한 환경 정도만 조성된다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럭저럭 잘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고양이들이 마냥 의존적인 존재는 아니다.
고양이들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기 위해 내가 맡은 역할은 캣‘맘’ 보다는 동네 고양이들의 삶을 보조하는 ‘조력자’ 쪽에 더 가깝다. 남은 이별이 많다는 걸 알기에 내게 잡히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러나 고양이 조력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딸려오는 슬픔을 생각하기엔 밥 배달은 바쁘고, 아는 고양이들과 만나는 오늘의 기쁨은 크기에 그 순간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삶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그저 충실히 살아내는 무구한 존재들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