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은 조용한 몰입의 시간이었다. 애초에 공모전의 결과는 상관없었다. 한동안 싫어졌던 글쓰기를, 미완의 상태로 붙들고만 있던 글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스스로에게 셀프 마감을 부여하니 글을 한 편씩 완성할 때마다 정량적인 성과가 보였다. 마침내 모든 걸 끝냈을 때 가시적 형태로 드러난 성취. 누가 알아주는 건 아니었지만 내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1년 간의 깊은 늪에서 막 헤어난 참이었다.
지난봄 나는 모든 게 망했다고 생각했다. 망한 상태에서 붙들 건 달리기 뿐이라 달리기에 더 집착했다. 동네를 달리고 나면 세로토닌의 효과로 반짝 의욕이 올라왔다. 늘 그래 왔듯 내 몸과 마음은 예상대로 작동한다는 안도도 잠시, 당황스럽게도 의욕은 반나절도 가지 못했다. 몸은 쌩쌩한데 의욕은 자꾸 바람 빠지듯 새어 나갔다. 애매한 절망은 사주와 타로, 신점에 의지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인천까지 점을 보러 다녀왔다. 매일 밤마다 유튜브 타로 운세를 들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었다. 점괘를 들으며 내일은 부디 잘 살아보리라 다짐하며 잠을 청하곤 했다. 3n세의 방황은 더욱더 가혹했다. 지난 20대에 걸쳐 비슷한 구간을 이미 다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경험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글쓰기는 왜 시작해서 나는 이렇게 되었나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대한 원망, 그 속에 실은 스스로를 향한 미움이 뒤섞였다.
꼬박꼬박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하고, 짬이 나면 무조건 사람 많은 곳으로 섞여 들고,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 모두 깊은 바닥에서 시작된 변화다. 매주 진료실에 앉아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의학적 소견을 듣는 일은 그 자체로도 내게 동기부여가 됐다. 드디어 유튜브 타로 대신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다. 아무래도 현대 의학 전문가를 맹신하는 게 낫지. 취약한 마음으로 인해 나는 선생님의 조언을 쭉쭉 흡수하는 성실한 환자가 됐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씩 할 것. 시간이 빌 때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쓰다 만 글들, 조각난 메모 파일들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고 오는 일이 허다했다. 집중력 저하와 항우울제로 인한 졸음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약을 바꾸고, 앉아있는 시간을 점차 늘려갔다. <우울할 땐 뇌과학>에서 읽은 바로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데 2주가 걸린다더니 어영부영 성과 없는 (그래서 더 우울했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서서히 앉아있는 힘이, 뭔가를 써볼 힘이 생겨났다. 현대 의학과 꾸준한 운동, 자기반성의 콜라보였다. 의욕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게 망했다고 느껴지면, 그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목표를 향해, 끝내기를 향해 매진하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순수하게 글쓰기의 기쁨을 즐겼다. 나를 괴롭히던 조급함, 질투나 자격지심도 없었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처음부터 시작했으니까 비교 대상도, 바라는 것도 없다. 내내 처음 글쓰기를, 독립출판을 준비했던 몇 년 전의 시간을 떠올렸다. 순수한 몰입과 즐거움은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의 시간이다. 내게 생의 힘은 늘 반동 작용이다. 깊은 늪에 도착하고야 스스로를 끌어올렸듯 이대로 살 순 없다며 불현듯 찾아오는 경각심, 나쁜 방향으로 향하고 나서야 먼 길을 돌아가는 우둔함 또한 느리지만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늘어선 내 그림자들을 모두 끌어안는다. 지금 내 안에 생겨난 힘을 소중히 잘 가꾸고 싶다. 항우울제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