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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Dec 09. 2022

너무 미운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를 그토록 격렬하게 미워해 본 일이 있었던가. 그 사람을 벌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서 저주하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고, 그 사람의 집을 지나칠 때마다 노려보며 증오한 적이 있었던가. 생판 남에게 이렇게 커다란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었다. 미움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불행하기만을 기다리는데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분함은 더 커져만 갔다.


동네에서 길고양이를 교묘하게 괴롭혀왔다던 바로 그 노인 말이다. 몇 년 전 어느 날 그 사람이 고양이 밥그릇을 버리는 걸 내가 발견하고 싸운 것이 첫 갈등이었다. 그때는 스스로를 고양이 조력자로 정체화하기 전이라 잃을 게 없었고, 몇 살이라도 더 젊었던 탓인지 패기 있게 부딪히길 반복했다. 알고 보니 동네 캣맘과 그 사람의 갈등은 이미 내가 길고양이에게 관심을 쏟기 훨씬 전부터 이어진, 만성화된 문제였다. 초반에는 직접적으로 고양이를 괴롭혔다고 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동물 학대가 이슈화되고, 동물보호법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자 괴롭힘은 캣맘에 대한 괴롭힘으로 진화했다. 밥그릇을 던지거나 고양이집을 훼손함으로써 캣맘의 일을 훼방 놓는 식이었다. 매일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니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씨씨티비 설치를 알아보고, 오죽하면 하루 작정하고 대기하면서 증거를 잡아볼까 싶기도 했다. 동물 단체와 구청의 도움도 받았지만 증거를 잡기가 애매한 점, 고양이들에게 더 큰 피해가 올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내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양이 조력자로서 잃을 게 많은 나는 이제는 나서서 싸우기보다는 웬만하면 내 쪽에서 양보하고 고개를 숙인다. 법을 근거로 들어 사실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인정에 호소하는 편을 택한다. 이쪽이 감정 소모도 덜 하고 의외로 해결이 빠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주민의 오토바이 위에 계속 고양이가 올라간다는 민원이 들어와 조마조마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겪으면 속상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저 조마조마한 정도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토바이 주인을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연신 사과를 하며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동네 고양이들에게 호의적인 분이라 함께 의견을 조율할 수 있었다. 따로 고양이 스크래쳐를 놓고, 오토바이 덮개를 사드리고, 주차 위치를 조정하는 걸로 갈등은 마무리됐다. 챙겨야 할 식솔이 있다는 건 정면 돌파보다는 우회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뜻이었다.


지긋지긋하게도 길었던 그 노인과의 갈등이 어찌어찌 잠잠해질 무렵, 그의 소식을 들었다. 매일 집에서 술만 마시던 그가 노인 공공근로를 하러 다닌다는 소식이었다. 이게 바로 사회 활동의 순기능인가. 술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온 동네에 해코지를 하고 다니던 사람이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니 해코지할 여력도 없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을 하는지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일이기도 했다. 저 사람의 삶이 지나치게 팍팍한 탓에, 세상에 불만이 많아서, 혼자 사는 게 억울해서... 그래서 애꿎은 동물을 괴롭히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 그렇게라도 납득해야만 내 안의 미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옥섭 감독이 이런 말을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너무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해 버린다는,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다는 얘기를 했다. 이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전에는 고약한 노인네 얼른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길 저주했지만 지금은 차라기 그가 잘 살길 바란다. 지금처럼 성실히 출근도 하고 삶에 만족하길 바란다. 너무 잘 살아서 길고양이 따위에 관심도 가지지 않기를, 관대해지기를 바란다. 애꿎은 약한 생명을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에너지를 쏟길 바란다. 이제 나는 미운 사람이 그저 잘 살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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