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나서야 다른 아픈 몸들을 상상하다
마음이 지칠 때마다 만물 달리기 설은 빛을 발했다. 달리기 한 번만 하고 나면 정말로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그런데 달리기에도 내성이 있나 보다. 심장 박동이 아무리 빨라져도 언제부턴가 멍한 날들이 지속됐다. 7km나 달렸는데 왜 이러지?
처음에는 체력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를 더 몰아붙였다. 꾸역꾸역 달렸다. 그러자 몸은 건강한데 마음은 무기력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상태가 됐다. 꾹 누르고 있던 마음이 터져 나왔던 어느 날 드디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운동 정말 열심히 하셨네요. 그래서 그동안 버티신 것 같아요." 자율신경계 검사 결과지를 보며 선생님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이렇게 균형적인 그래프는 거의 처음 본다고 했다. 스트레스 저항도가 높고 면역력이 좋다는 뜻이었다. "이렇게나 건강한데 저는 왜 이런가요?" 우울증은 뇌신경전달물질의 문제고, 다양한 원인이 작용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몸이 건강하니까 마음도 건강할 거라 굳게 믿어왔는데 내가 쌓아 올린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하긴 운동선수들도 슬럼프가 오고 우울증이 오는데 나라고 왜 안 그렇겠는가. 그리고는 끝내 인정하기 싫은 진실을 마주했다. 달리기의 성실한 보상 체계는 나를 성장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픈 나를 좀처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노력을 쏟은 만큼 돌려받는 게 익숙해질수록 은연중에 많은 일을 체력과 의지의 문제로 돌렸다. 멀쩡하게 운동을 수행하니까 뇌의 세로토닌 문제일 거라고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그저 아무런 의욕이 없는 나를 탓했기만 했던 거다.
그런데 달리기가 나를 구원했다고 쓴 글은 어쩌지?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에서 나는 만성적인 무기력증을 달리기를 통해 개선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지금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내 상태가 책을 읽어준 독자들을 속이는 게 될까 봐 아찔해졌다. 게다가 이런저런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마치 운동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처럼 말하고 다녔던 건 아니었을까. 지난해 북토크에서 했던 말이 걸렸다. "누구든 달릴 수 있어요." 나처럼 약한 몸으로 살아왔던 사람도 꾸준히 달리게 됐으니 힘이 됐으면 해서 했던 말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은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질병이나 장애로 달리기가 힘든 사람이나, 우울증으로 의욕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인 사람이 있었다면 의도치 않게 그 사람들을 배제했던 셈이다. 지금의 나는 그 말에 강력한 반발심이 들었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원인 모를 신체 통증까지 겹치는 바람에 일상에 큰 지장을 받았다. 주기적인 어지럼증과 메스꺼움, 잦아진 편두통, 원인 모를 오한과 근육통, 위 통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응급실, 내과, 신경과, 정신과를 차례로 방문했다. 생계 활동을 하기 위해 꾸역꾸역 버스에 오를 때면 어지럼증과 멀미가 밀려왔다. 당연히 한동안 달리기는 포기해야만 했다. 건강을 노력으로 지킬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튼튼한 두 다리로 달리며 자신만만하던 때가 전생처럼 아득해졌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조한진희 작가는 '건강중심사회'를 비판하며 잘 아플 권리(질병권)에 대해 말한다. 건강중심사회란 건강을 중심에 두고, 건강한 사람을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건강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사회라는 의미다. 건강 중심 사회에서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상태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고, 그 과정에서 아픈 몸은 소외된다. 회사에 다니며 자주 골골댔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약한 몸은 이 사무실에 내가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게 했다. 다른 팀원들에게 업무 지장을 주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조퇴할 때면 눈치가 보였고, 창백해진 안색을 들킬 때면 '민폐 끼치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했다. 누구 하나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사무실 내에서 아픈 몸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낙오자라는 느낌이 그토록 건강한 몸을 열망하게 만들던 걸까. 건강한 몸을 열망하느라 한동안 내게서 잊혔던 통증이 다시 일상을 뒤덮고 나서야 '아픈 몸이 기본값인', '질병이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질병권의 의미를 새삼 깊이 돌아보게 됐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노화와 질병으로 더 이상 달리기가 구원은 아닌 것 같다고 고쳐 써야 할까. 내가 썼던 글들이 혹여나 아픈 사람에게 건강해지라고 종용했던 건 아닐까. 아니면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타인을 가혹하게 바라봤던 건 아닐까. 그런 걱정들 사이로 내 주위 만성 질환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는 갑상선 약을 복용 중이고 퇴행성 질환으로 한쪽 어깨의 움직임이 힘들다. 전에는 운동을 권하며 잔소리했지만 엄마에게는 운동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인식한다. 동생은 잦은 편두통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케이는 오랜 우울증으로 인해 신체 활동을 하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내 몸 안에 갇힌 인간이라 신체적, 정신적 통증을 겪고 나서야 다른 아픈 몸들에 대한 상상의 여지가 생긴다. 건강한 몸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남일 같던 각종 질병들을 가능성의 영역 안에 두고 나면, 건강이란 고통을 잊은 잠깐의 상태일 뿐이다. 내게 달리기가 어렵다고, 꾸준히 달리기가 힘들다고 말하던 얼굴들이 가끔 떠오를 때면 그때 무슨 말을 했어야 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처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탓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란다. 아픈 나를 더 살피고, 스스로의 약함도 허용하길 바란다. 달리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도 아프고 약한 몸을 배제하지 않는 사려 깊은 말들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