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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Oct 24. 2023

아직 망하지 않았어

요즘 가장 큰 즐거움은 동네 도서관이다. 새로 리모델링한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게 바로 복지구나 싶다. 그래서 평일 오전 노트북을 챙겨 들고 도서관으로 간다. 과외 수업을 가기 전까지 최대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큰 통창을 마주 보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고, 노트북 코너에 앉아 메일링 서비스를 준비한다. 지루해질 때쯤 서가 사이를 산책하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재미난 책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곳에서 보내게 될 노년을 직감했다. 늙어서 갈 곳이 없고, 가족도 친구도 없을 때 여기로 올 것이다. 조용한 공간에 책, 영화 DVD, 산책로까지 내가 원하는 건 이곳에 다 있다.


카페를 두 번씩 바꿔가며 전전하지 않아도 공짜로 쾌적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도서관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공간이다. 나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도서관에 올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놀랍지만 한편으론 안도한다. 연령 불문 나처럼 시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그래서 홀로 집중한 사람들을 보며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종종 내가 뭐 하고 있나, 생각하다 보면 막연히 이 단어가 떠오른다. 계류 중.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계류 중인 법안, 또는 항해에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장기간 계류 중인 선박. 희망을 가진 채로 녹슬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그런데 이 도서관에만 오면 계류된 선박 같은 사람들이 꽉 채우고 있는 거다. 책을 쌓아둔 채 뭔갈 열심히 쓰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 인강에 몰두하는 학생들, 주식 그래프 띄워놓고 공부하는 중년들까지 얼마나 열심히 들인 지 그 공기에 압도되고 정신이 번뜩 깨고 만다. 이 사람들은 저마다 항해에 적당한 상태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상에 수동적으로 묶인 게 아니라 스스로를 부지런히 보수 공사 중이다. 그런 장면 속에 섞여 있으면 어쩔 도리 없이 고무되어, '나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희망이 온몸을 일깨운다.


집중력이 흩어질 때쯤엔 서가 사이를 산책하며 눈이 가는 책은 무작정 뽑아 든다. 절대 그 모든 책을 읽는 건 아니다. 책을 한 아름 쌓아둔 채 그저 표지를 훑고, 목차를 살펴보는 것뿐이다. 거대한 책장 속 책의 제목을 훑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더 깊이 안도한다. <패자의 생명사>는 38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항상 패자였다고 말하는가 하면, 누가 신경이나 쓸까 싶은 이끼를 한평생 연구한 식물 생태학자의 <이끼와 함께> 같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캐서린 매코맥의 <시선의 불평등>을 읽어 내려가며 대중문화 속 여성의 편향된 이미지가 어떻게 생산되어 왔는지 알게 될 때, 송곳처럼 뾰족하고 지적인 문장들이 내 안의 지적 갈망을 자극한다. 또 어떤 날엔 중세 시대 주술에 관한 책을 발견하고는 세상에는 별 걸 다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매번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을 지나치며 늘 같은 자리에 꽂혀있는 이 책을, 아무도 대출하지 않는 이 두꺼운 책을 언젠가 위안이 필요할 때 꺼내 보리라 다짐한다.


리베카 솔닛이 썼듯이 '도서관은 일어났던 모든 일이 저장되어 기억되고 삶을 되찾는 장소, 종이가 가득한 상자에 세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을 모아놓은 이 공간에서, 내 협소한 삶과는 가장 거리가 먼 단어를 발견하는 일은 하나의 전략이 된다. 식물의 삶과 AI의 미래를, 중세와 원시 사회를 넘나들며 내 삶을 축소시켜 버리기. 내 삶의 해상도를 줄인 후 세상의 수많은 모험담과 실패담 사이로 뛰어들면 내 이야기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이야기가 되고, 그러면 온갖 지혜와 비법서가 가득한 이곳에서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오늘처럼 <운명을 바꾸는 명리 쉽게 배우기> 같은 책을 만난 날이면 운도, 삶도 별일 아니다. 희망이 보이지 날이 온다면 그때는 이 책을 빼어 들고 독학을 시작하면 된다. 아니면 점성술 책을 모두 섭렵하고 타로 마스터가 되는 상상을 한다. 연륜이 있으면 유리한 직업이니까 나이가 들어하면 더 좋을 것이다. 우연히 만난 금융 실용서로 갑자기 주식 공부에 뛰어들거나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너무나 풍성한 가성비 노년 아닌가, 하며 상상하다 금세 생각을 거두었다. 국민연금이 없을 확률이 높고 질 낮은 일자리를 전전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때까지 내 코어 근육이 남아날까 책 볼 시간이 있을까. 도서관 산책자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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