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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Jan 19. 2024

최선의 태도

겨울에 하는 달리기는 꽤나 자발적인 고통에서부터 시작한다. 우선 달리기에 두꺼운 옷은 적합하지 않다. 얇은 옷을 겹겹이 껴입었지만 여전히 몸은 시리고 무겁다. 맨살이 드러난 얼굴과 손목은 본능적으로 옷 속을 파고들려 하고, 허벅지의 감각은 둔해져서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고통스러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냅다 달려야만 한다.


겨울 달리기의 특별함은 시린 냉기 속에서 스스로 온기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수족 냉증으로 늘 차갑던 손이 갑자기 시리지 않을 때, 그러다 얼마 안 가 열이 나고 땀으로 등이 흠뻑 젖을 때 나는 알게 된다. 어떤 난방 기구보다도 스스로 만들어내는 열기가 가장 뜨겁다는 것을. 마침내 온몸이 뿜어내는 열기에 옷을 열어젖힌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홀로 땀을 뻘뻘 흘리는 건 꼭 야외 노천탕에 들어가 있는 듯한 아늑함을 주고, 남들 다 일하는 월요일 연차를 쓴 직장인 마냥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둘러싼 온도를 바꾸는 일은 겨울 달리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이다. 응당 추워야 할 때에 덥다며 여유를 부리게 된 나는 한껏 고양되고 도취된다.


이럴 때면 빌 헤이스의 <스웨트>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린다. 고대 세계에서는 운동선수가 흘린 땀이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땀을 긁어모아 거래했다는 이야기. 훌륭한 운동선수의 땀에는 ‘탁월함을 향한 매진’을 뜻하는 아레테의 정수가 그 안에 깃들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탁월한 운동선수가 아니지만 냉기 속에서 흘린 땀은 내가 달리기에 매진했음을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봄, 가을의 쾌적한 달리기보다도 겨울 달리기를 할 때면 땀이 왜 그렇게나 고귀하게 여겨졌는지 단번에 와닿는다. 그 땀을 모아 의료 목적으로 썼다던 고대인들의 땀에 대한 집착도 어쩐지 수긍이 가고야 만다.


그리하여 1월 1일, 연말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재빠르게 전환되어 조바심을 자아낼 때 나는 달리기를 택한다. 굳이 탁월해질 필요도, 딱히 탁월해질 것 같지도 않지만 탁월한 태도를 흉내 내며 추위와 바람을 뚫고 땀 흘릴 때까지 달린다. 에리히 프롬의 가르침도 함께 떠올린다. '자발적인 활동만이 자아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설계한 소박하고도 자발적인 고통 안에서 안도한다. 달리는 시간만큼은 일상 통틀어 최선의 태도를 갖게 되므로 다가올 삶의 불확실함 앞에서 조금은 의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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