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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놀 Aug 13. 2021

변하는 것은 왜 슬픈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카프카의 <변신>과 함께하는 질문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라틴문학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작가의 가장 재미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문학작품 가운데 서양 미술에 가장 많은 소재를 제공한 작품이다. 우주와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작품은 새로운 몸으로 변신한 형상들을 노래한다. 그런데 변신하는 주체들의 이야기는 왜 다 슬픈 걸까?     

월계수가 된 다프네, 암소로 변한 이오, 아버지를 닮고 싶었던 파에톤, 나르깃수스와 에코의 이야기, 짧은 서사시에서 슬픔을 건지다가 때로는 안심하고 때로는 위안을 받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을 딱 잘라 나누기는 어렵겠지만 기쁨보다는 슬픔에 공감이 더 크고,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이 잊기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변신도 양면성이 있어서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있겠지만 원치 않는 변신, 외부의 힘에 의한 변신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르고스의 왕, 이나쿠스는 자신의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잃어버린 딸 이오를 애도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딸을 찾지 못한 그는 이오가 사라졌다고 여겼고, 마음속으로 불행한 일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의 딸 이오는 유피테르(제우스)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이를 눈치챈 유노(헤라)가 들이닥치자, 유피테르는 이오를 어루만져 흰 암소로 변하게 한다. 유피테르가 또다시 바람피울 것을 염려한 유노는 그것을 아레스토르의 아들 아르구스에게 지키라고 맡긴다. 

아르구스는 백 개의 눈이 있었다. 한 번에 두 개씩 돌아가며 휴식을 취했고, 나머지 눈들은 치켜뜨고 파수를 보았다. 그는 어떤 자세로 서 있든 이오를 감시할 수 있었다. 암소로 변한 이오는 아버지와 언니들을 따라다니며 자신을 쓰다듬게 내버려 두었고 감탄하는 그들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연로한 이나쿠스가 풀을 좀 뜯어 그녀에게 내밀자,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핥고 손바닥에 입 맞추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말 대신 발굽으로 땅바닥에 글을 써서 자신이 변신하게 된 슬픈 사연을 알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탄식했다. “내가 신이라는 것이 괴롭구나, 죽음의 문은 내게 닫혀있고 내 슬픔은 영원토록 지속되어야 하니 말이다.”      

이오를 구하려면 백개의 눈을 가진 아르구스의 눈을 잠재워야 한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구스의 눈을 잠재운 것은 메리쿠리우스의 '갈대 피리'였다. 아르구스는 부드러운 잠을 물리치려 노력했지만 결국 잠들어버렸다. 

메리쿠리우스는 일백 개의 눈을 수습하여 공작의 깃털들에 옮겨놓았다.

유피테르는 이오의 모습을 되돌리기 위해 유노에게 간청했다. 이오는  드디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숲, 2005)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알릴 수 없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신하게 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그들을 지켜보던 신들까지 슬픔에 겨워 그녀를 돕지 않았던가. 변신이 슬픔인 이유는 이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온 원치 않는 변신일 경우다. 그 누군들 이런 변신이 좋겠는가.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원치 않는 변신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나마 신들이 함께하던 신화의 시대에는 신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현대에는 그런 힘을 기대하긴 어렵다. 



카프카의 변신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보라.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벌레로 살다 벌레로 죽는다.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은 변신으로, 원인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사고와 같은 것이다. 그의 ‘변신'은 삶 전체가 위기에 처한 현대인의 상황을 벌레의 형상을 빌려 우화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주인공은 이제 껍데기에 불과하다.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그가 벌레로 변하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차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안정되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그레고르의 수입에만 의존하던 이전과 달리 이제 그들이 경제적 능력을 가진 주체가 되었다.

그레고르는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건 여동생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 때의 소동과 이어 아버지의 사과 폭탄 세례다. 그 두 개의 소동은 그의 죽음을 재촉한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상실했고, 상실한 언어를 대신해 벌레의 몸짓으로 표현했을 때, 그의  몸짓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제 어쩐다?' 그레고르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온몸에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차차 약해져서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등에 박혀 썩어버린 사과와 그 주변의 염증 부위가 솜털 같은 먼지로 온통 뒤덮여 있었는데, 이미 그런 것들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가족에 대해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여동생보다 그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다. 탑시계가 새벽 3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렇게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창 밖의 세상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아직 알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푹 떨어졌고,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 세 사람은 집을 나선다. 몇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따스한 햇살이 차 안 곳곳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생각해 보니 전망이 그리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 목적지에 이르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젊은 몸을 쭉 피며 기지개를 켰을 때,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여겨졌다.“(<변신>, 카프카, 문학동네, 2005)     


그렇게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되돌릴 수 없었다.




누구든 현실에서 그레고르 잠자와 같은 변신을 맞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오의 슬픔과 이오 가족의 슬픔 또한 겪고 싶지 않은 슬픔이다. 그러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변신이기도 하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일상적인 변화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호흡하고 있다. 현대는 변화를 추구하며 산다. 변신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분신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시대다. 그러나 변신은 되돌릴 수 있어야 해피앤딩이다. 무수히 많은 다양한 변신 합체 로봇이 그러하듯, 게임 캐릭터가 그러하듯. 급할 때 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변신은 유연해야 하며 다양하고, 쿨하고, 창의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결론적으로 슬픈 변신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변신'은 슬퍼야 남는다. 가슴이 아프지 않은 변신을 어떻게 담아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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