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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놀 Aug 13. 2021

당신이 옳다
공감에 #해시태그 달기

당신이 옳다, 정혜선, 해냄, 2018

정혜신의 적정 심리학

당신이 옳다 - ‘공감’에 해시태그 달기     

     

이 책의 시작은 이렇다. 글쓴이 정혜선의 남편이면서 영감자인 이명수가 책에 대해 소개한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이라고. 그는 이 책을 ‘심리적 CPR’에 관한 내용으로 책이라기보다  행동 지침서라고 말한다. 적정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정해신의 공감’을 얹었다는 소개다. 그의 아내 정혜신은 정신과 의사라는 전통적인 틀어서 벗어나 치유자라는 생각이 확고하며 그녀의 의견을 지지한다고 썼다. 그의 조언을 들어보면 이 책을 읽고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만 안 할 수 있어도 공감의 절반은 시작된 거라고 말한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아픈가, 우리에게 절실한 것, 공감, 경계 세우기, 공감의 허들 넘기, 공감 실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6부의 과정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과 ‘나와 너를 동시에 보호하는 것’ 그것이 곧 공감이라는 것이다. 결국 삶은 자기 존재에 주목하면서, 그 이후부터 진짜 내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저자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나에 주목하고, 나를 짓밟지 말 것이며 자기 보호의 전문가가 되어야 다른 사람과도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부드럽고 다감한 글 줄기를 따라가다 멈춰섰던 부분들에 #를 달아보기로 했다. 누구든 멈춰서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멈추어 서고 싶은 순간에 #를 달아보았다.     




# ‘당신이 옳다’라는 말의 온도

살면서 ‘당신이 옳다’라는 말을 얼마나 주고받았을까 헤아려봤다. 자주 하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옳았거나, 당신이 틀렸다는 말을 더 자주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당신이 옳을 수’ 없는 걸까. 이제껏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고 싶어 진다.

충초평판, 이 말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내가 했던 말이나 들었던 말들 속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책 속에 나온 사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면 더 피부에 와 닿을 것이다.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열일곱 살 A가 있다. A는 오늘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 그가 내게 전화한다면, 

나는 뭐라고 말했을까. “집에 또 못 들어가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같은 말은 아니었을 거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다’ 라거나, ‘독립할 능력 없으면 참고 살아라’는 등의 말이었을 것 같다. A에게 ‘정서적 네 편’이 되지는 못했을 거다.  더 쓸쓸해지거나 참담해졌을 그 말을 충고라고 했던 것이다. 

일단, ‘당신이 옳다’를  기억하는 것이 우선이다. 기억해야 행동할 수 있으니. 행동지침서라 하지 않았는가.

“당신이 옳다.” 이 말과 함께 따뜻함과 깊음의 온도를 기억하자.  



   

#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말의 신선함

이 질문 또한 한 번도 해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 사용하는 말이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에 주목한 안부를 묻는 말은 한 적  없는 것  같다.  “돈은 잘 벌고? 건강도 괜찮지? 그럼 됐네.” 정도의 말들이 안부를 묻는 말이었다는 부끄러 움. 그렇다면 나는 ‘나’ 이야기를 막힘없이 내놓은 적도 ‘너’ 이야기를 막힘없이 들어본 적도  없다는 얘기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 취향이나, 옷이나 액세서리, 신념이나 견해, 가치관 역시도 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유입된 것이니 나 자체가 아니라는 말. 어쩌면 아직 한 번도 내 존재로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로 들어가는 문을 열지 않았던 거다. 

타인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문을 열자, 나와 너에게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거다. 



    

# 충조평판의 오류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네 선택이다. 너의 선택에 대해 네가 책임져야 한다.”

맙소사. 이 말이 폭력인 줄 이제야 알았다. 딸이 어렸을 때, 학원을 선택하거나, 학교를 선택할  때  

내가  했던  말이다. 친구 따라 학원  가는 것이 못마땅했고, 경쟁하고 도전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마음에 나온 말이다. 이제야 알았다. 나중에 후회하면 안 되는 선택은 없다는  걸. 그토록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강요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조금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내 선택은 뭐 그리 훌륭했던가. 책임까지는 몰라도 처절하게 후회한 적이 내 기억에도 몇 번은 되는데….  뻔뻔하게도 어린 딸에게만 그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기억났다.  진로 선택에도 마찬지였다.

“일단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은 있어야지. 그다음에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취미는 기본적인 생존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할 수 있는 거야.”

디자인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에 내가 던진 말이다. 잘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른 거라고. 진로 선택은 ‘잘하는 것’을 하고 ‘하고 싶은 건’ 취미로 하라고.

딱 잘라 얘기했던  내 뜻대로 딸은 국문과를 졸업했고,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던 그 시절의 꿈 은 잊은 듯하다. ‘취미로 해. 디자인이 뭐 별거니?’라는 말이 무척 섭섭했단다. 이것이  거리낌 없이 날리는 ‘널 위한 거’란 허울 좋은 충조평판이었다는 사실, 깨 닫 는 다.   



  

# 공감과 감정노동 구분하기

“공감은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 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노동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지친다. 참다 참다 인내심을 잃고 폭발하거나 폭발하지 않더라도 지치고 짜증이 나서 다시는 그 사람을 안 만나고 싶어 진다. 일방적으로 쏟아낸 사람도 집에 돌  아가면 찜찜한 마음이 생긴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다. 공감과 감정노동은 구분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공감하는 자세라 여겼던 것이 아니  었던 거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며 상대   에게 공감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난 시절의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 상    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따스하게 물어줘야  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새겨두자.    


 



#당신이 옳다 #나도 옳다- 마지막 헤시 태그

당신의 옳음과 나의 옳음을 함께 보길 원한다면 이 책을 들고 햇살 좋은 창가로 가기 바란다. 그 ‘옳음’이 다가올 것이다. 그 순간을 마주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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