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문 <바람도 때론 슬프다>와 한수산 <사월의 끝>과 함께 기억하는..
어린 시절, 엄마는 봄이 오면 이불 홑청을 모두 빨아 다듬잇돌에 두들기고 풀을 먹여서 몇 날 며칠을 말리고 다듬어 풀내 나는 새 이불로 갈아주었다. 이부자리가 좋아야 한다며. 햇볕 냄새가 좋지 않냐면서 흐뭇해하셨다. 새로 갈아준 봄 이불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어디 이불뿐이겠는가. 서랍장을 열 때마다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옷 서랍도 정리해 봄옷을 반듯하게 넣어주셨다. 그때는 지금보다 분명 봄 날씨가 좋았던 것 같다. 황사에 대한 기억조차 없으니. 올해도 봄이 왔다. 벚꽃도 조금씩 피기 시작했고. 꽃놀이를 갈 기분은 아니지만 마음은 눈꽃처럼 가볍다. 책장을 정리하다. 소설 두 권을 발견했다. 햇살 잘 드는 창가 책꽂이에 꽂아둔다.
엄마가 이불에 풀 먹이고, 새 옷을 서랍장에 넣어주신 것처럼.
잊을 수 없는 벚꽃의 이미지를 심어준 채희문의 <바람도 때론 슬프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
병약한 성주 히로다다가 벚나무에 말고삐를 매다 말고 부하와 나누는 대화가 나온다.
“벚꽃은 깨끗한 꽃이지. 대번에 펴서 대번에 진다. 두 사내를 섬길 정도로 미련한 꽃이 아니거든.”
히로다다는 다른 남자를 만난 아내와 깨끗하지 못한 이별을 하느니 대번에 흔적도 없이 져버리고 마는 벚꽃처럼 자기 아내도 대번에 목숨을 끊고서라도 깨끗하게 결별해주는 쪽을 원했다.
500년 전 이야기로 시작한 이 소설은 40년 전 음력 사월의 봄날로 간다. 싱그럽기 그지없는 봄바람이 불던 날,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말한다. “어쩜 그렇게 벚꽃 지듯이 대번에 죽어버리니.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세상을 뜨냐 이 말이다.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은가 봐. 난 이제 어떻게 사니….”
벚꽃처럼, 대번에 깨끗하게 죽어버린 두 죽음을 본다. 주인공은 흔적 없이 미련 없이 단박에 가버린 많은 이들을 떠올린다.
“내 몸의 땀구멍은 한결같이 히로다다, 루돌프 헤스, 로맹가리, 들뢰즈, 몽데를랑, 알베르 카뮈, 미시마 유키오, 신춘 소설가 모씨 제임스 딘, 롤랑 바르트의 죽음을 향해 열려 있었고 내 몸의 솜털은 그 땀 구명 하나하나마다에서 그 죽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 아, 아직도 불가사의한 아버님의 벚꽃 같은 죽음, 그리고 4 반세기 넘게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다가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신 어머님. 아마도 ‘믿음’이었을 것이다. 죽음으로써 알리고자 했던 의미는.”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그는 이비인후과에서 귀를 치료받던 중 벚나무 가지가 하늘을 향해 오르는 장면을 본다. 살아서 슬프다. 바람도 때로 우는 것을. 인간의 슬픔이야 거기에 비할까.
“오목거울이 광채가 이리도 강렬했던가? 시린 눈을 안정시키려고 문득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니 벚나무 가지 하나가 싱싱한 초록 잎사귀를 잔뜩 매단 채 하늘을 향해 오르는 중이었다.” (<바람도 때론 슬프다>, 채희문, 서연바람, 2019)
때로 바람이 슬프다. 사월에 벚꽃을 지게 하는 바람,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며 마음의 한 올 한 올을 풀어놓는
그 바람이 슬프다. 소설이 죽음에 대해 던져주는 의미는 어쩌면 '싱싱한 초록 잎사귀를 잔뜩 매단 채 하늘을 향해 오르는 벚나무 가지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은 벚꽃처럼 간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월의 끝>이란 한수산의 소설은 오래전 소설이지만 두고두고 사월이 되면 생각나는 소설이다.
“누나와 함께 강에 나간 적이 있었지. 잔잔한 강물 위로 산이 거꾸로 비쳐 있었다. 우리는 바위 위로 올라갔다. 누나는 말했다. 나 목욕하는 동안 넌 여기 있어. 그리고 누나는 나를 바위 위에 뉘었다. 너 일어나면 안 된다. 왜. 나 지금 옷 벗는단 말이야. 누나의 목소리가 바위 밑에서 들렸다. 나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누나가 옷으로 앞을 가린 채 내 옆에 몸을 굽혔다. 너 여기 가만히 누워있어. 옷이 날아갈까 내 옷을 네 옷깃에 핀 침으로 꽂아놓고 갈 테니. 나는 돌아서서 내려가는 누나의 앙상한 어깨와 팔죽지를 보았다. 앞산에서 솔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돌이 구르면 여자가 죽고 여우가 울면 남자가 죽겠지. 양짓말에서… 음짓말에서… 나는 슬며시 일어났다. 강물에 비친 산속에 누나의 나신이 박혀 있었다. 나는 말했다. 누나 나 간다. 그때 누나는 고개를 돌리는가 하자 인마, 하고 소리치며 강물에 몸을 잠갔다. 그리고 얘 얘 얘 옷 가져와,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믿었었다. 열네 살의 누나가 벗은 몸으로 옷을 가져가기 위해서 뛰어올 것이라고. 그러나 누나는 달려오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모랫길을 따갑게 밟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의 옷에 허리에서 펄럭일 때 나는 더욱 무서웠다.
누나가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 형이 옷을 내다 준 후였다. 열에 들떠 앓아누운 누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전후의 식량난 속에서 누나는 그렇게 누었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며 맞은 몇 대의 침이 그녀가 받은 치료의 전부였다.
그날 혼자 돌아와야 했던 소년은 신비와 오해의 줄을 풀어 누나의 얼굴 같은 연을 날리며 성장해버렸다. 날아가버린 연을 생각하듯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4월의 끝이다.
어린 소년은 누나가 죽은 날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갯가로 갔다. 캄캄한 밤이었다. 추위로 어금니가 딱딱거리고 온몸이 굳어질 때까지 그가 앉아서 기다렸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에게 "돌이 구르는 것을 보려고요."라고 말했다. 그때가 '마지막 순수'였다고 어른이 된 소년은 말한다. 그는 청년이 되어 사업에 바쁜 형대신 형수와 함께 병원에 간다. 형수는 중병에 걸렸다. 형수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지 않는 형을 기다리며 입원을 미룬다. 결국 입원을 미룬 나머지의 며칠은 웃음을 만들며 지냈다. 입원을 미루고 병원을 나서는 형수의 미소를 천사의 미소라 표현한다. 삶은 이렇게 허무하지만 아름다운 면이 있다. 그와 형수의 병원 앞에서의 대화는 형수가 죽기 전 형대신 웃음을 주는 시동생과 만들어낸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그가 소년일 때 누나에게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지금 형수에겐 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죽음의 순간을 지켜주는 것은 이렇듯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말이다.
풀내 나는 이불은 아니지만 오래 묵은 소설의 향과 빛깔이 제대로 빛나던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