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 <역사의 쓸모>, 2019
"삶이라는 문제에 역사보다 완벽한 해설서는 없다"
최태성의 <역사의 쓸모>는 이렇게 시작된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2장,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4장,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들어가 보자.
역사적 사고- 품위 있는 선택을 돕는다
"역사적 사고란 역사 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해 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고는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에게만 필요할까?
자신의 생각이나 말, 의견이 누군가의 나쁜 선택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역사적 사고는 필요하다, 바로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구진천의 선택- 품위를 지키는 삶
구진천은 신라 문무왕 때 사람으로 무기 만드는 기술자였다.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다.
당시 신라의 쇠뇌의 성능은 화살이 1000 보나 날아갔다고 한다.(700미터에 가까움)
구진천이 살았던 시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했고, 당나라 황제가 구진천을 내놓으라 요구한다. 당으로 간 구진천은 쇠뇌를 만들어 바치라는 명령에 따라 쇠뇌를 만들어 시연했지만 60보 남짓 가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신라의 나무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를 잔뜩 머금어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 기록이 그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나당전쟁이 시작된 670년 당나라에는 1000보를 날아가는 화살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끝내 쇠뇌를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진천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품위를 지킨 삶이라 할만한다.
정약용의 선택 - 역사의 평가
정약용은 정조가 키운 학자다.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은 '종교'였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천주교를 믿은 정약용의 집안은 무사할 수 없었다. 정조는 이어지는 상소에 어쩔 수 없이 귀향을 보내며 다시 부르기로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승하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서 18년을 보낸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암담하고 비참한 시간을 폐족이 되었다는 한탄과 힘든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해나간 것이 그의 투쟁이었다.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당부대로 살아, 둘째 아들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를 짓고, 큰 아들 정학연은 70에 벼슬을 얻어 폐족을 면한다. 2대에 걸친 노력이 비로소 폐족을 면하는 순간이다.
저자는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에 평가받으려 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죄인 정약용이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현대에도 활발히 연구되는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정약용의 선택은 역사의 평가였다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이 있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p.79
선덕여왕의 선택-황룡사 9층 석탑의 비전
리더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선덕여왕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신라의 위기를 타개한 혁신적인 방법은 탑을 짓는 일이었다, 9층 목탑을 지어 올리라 명령한 과감한 정치적 결단은 비전제시였다.
9층 목탑에는 층마다 신라를 괴롭힌 주변국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1층부터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 탐라까지... 언젠가는 신라의 발아래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마침내 탑을 완공하고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삼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p.87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말기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재해 관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개혁정치를 펼치던 공민왕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공민왕이 피살된 후 친원파 권문세족은 어린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은 사람 중 이인임이 고려에 온 북원사신을 접대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거부한 죄로 2년간 유배생활을 하고, 10여 년 동안 여기저기 떠돌며 생활하게 된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40년 가까이 몽골의 침입을 받으며 백성의 삶이 파탄 나고 조정은 엉망이고 불교의 폐단도 커졌다. 무엇보다 그는 백성의 안타까운 현실, 삶의 비참함과 가난, 가진 자의 수탈과 불합리한 제도, 정의롭지 못한 사회,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결심을 하며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 유배당하고 유랑하면서 만난 비뚤어진 세상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 해결 방법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조선왕조 500년의 이념과 제도 기틀을 마련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김육
김육은 1580년에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임진왜란으로 아버지를 잃고 10대에 소년가장으로 살았는데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가신다. 힘든 상황에서 과거에 합격해 스물네 살에 성균관에 들어간 후 4년 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영창대군이 살해되는 등 조정의 혼란이 더해져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귀농한다,
벼슬도 잃고 부모도 없어 고생 끝에 숯장사를 하게 된다. 고생스럽지만 그는 '애물제인,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을 구제하자'는 뜻을 품고 있던 그는 공납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대동법에 인생을 건다. 대동법은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다. 당시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한 제도다. 김육은 제대로 정치생활을 한 것은 50대가 되어서였지만, 대동법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70세에 사직상소를 올려 사직한 후,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리기 가지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난다. 삶을 던진다는 것은 이런 거다.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이회영
이회영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직계 후손이다.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며 부와 권력도 엄청났다. 몇 재에 걸쳐 풍족하게 쓸 만큼의 재산이었다. 이회영일가는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의 명이 다하자 압록강을 넘었다.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도모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이다, 재산을 급하게 처분해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그의 일가는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 홍범도와 김좌진의 전투로 대승을 이끌었다. 1932년 이회영은 예순여섯의 나이에 상하이에서 붙잡혔다. 모진고문을 받다 숨을 거두었다. 이회영은 30대 청춘의 나이에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한 번의 젊을 어찌할 것인가?" 그는 그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말'이 아니라 예순여섯 해의 '일생'으로 답했다.
어떤가?
삶의 문제에 부딪칠 때, 역사 속에서 길을 찾을만하지 아니한가.
결국 역사적 사고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 답은 나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어떤 선택이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