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놀렸니?” “그래, ‘네가 제니니?’ 아래위로 훑으면서, 키득거리고. 이름 바꿔줘오!”
“그래, 바꾸자. 점순이 어때? " 으이구. 눈치라곤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남편이 또 사고를 친다.
제니는 남편과 나를 번갈아 매섭게 쏘아보고 울음보를 터뜨려버렸다.
“쾅.”
방문이 닫힌다.
“저 계집애가….”
일어서려는 남편의 등짝을 세게 친다.
“점순이가 뭐냐? 당신이 잘못했어. 놔둬. 중2잖아. 북한도 무서워한다는.”
제니라는 이름은 세계화 시대에 맞춰 부르기 좋은 이름, 울림소리를 넣은 이름으로 짓는 게 좋겠다고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다. 내 이름에 들어가는 ‘ㄱ’이 싫었다. ‘미숙’ 흔하고 발음도 어렵고, 무엇보다 촌스럽게 여겨져, 딸레미 이름은 세련되게 짓겠다는 욕망이 발동해 지은 이름이 제니였다. 블랙핑크에도 제니가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블랙핑크가 아니라 이제니다.
제니는 중학교에 가면서 살이 찌기 시작했다.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운동을 거부한다. 애들이 놀리는 것 때문에 운동을 안 하겠다는데, 애들이 놀리는 이유가 뚱뚱해진 것이 이유라면 살을 빼야 한다. 그런데도 극구 운동을 마다하고, 식이요법도 지키지 않는다. 그러고는 매일 운다. 그야말로 지랄을 떤다.
화를 죽이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개명을 한다고 아이들의 놀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제니의 자존감을 되살려주는 것이 해답인데, 그렇다면 블랙핑크의 제니와 ‘다른 제니’가 되어야 한다. 외모도, 실력도 다르게 갖춘.
하아, 한숨이 나온다.
제니는 내일 아침까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저녁 대신 감춰둔 초콜릿을 먹을 것이고,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징징거릴 텐데.
어떻게든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똑똑.
다행히 방문은 잠그지 않았다.
“엄마랑 밖에 좀 나갔다 올까?”
“왜?”
“그냥, 이것저것 사고, 올리브영도 가고. 페이펄도 가고…. 저녁도 간단하게 먹고.”
대답 대신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성공이다.
아는 체하려는 남편을 눈짓으로 말리고 제니를 데리고 나왔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서 제니가 슬금슬금 다가와 팔짱을 낀다.
제니를 감싸 안는다.
“살 뺄래.”
“그래, 시작해 봐. 운동하고, 초콜릿 사지 말고. 일찍 자고, 두 끼만 먹자.”
“빠질까?”
“그럼. 무엇보다 당당해져야 해. 넌 이제니야. ”
“피이. 살 빼면 옷 사줘.” “당연하지. 그리고 울지 좀 마.”
“아빠 때문이야. 점순이가 뭐야?”
제니가 살짝 웃었다.
“근대, 어떤 애가 나한테 귀여운 얼굴이래. 예쁘진 않은 거지?”
“너는 어떤데? 니 얼굴이 어땠으면 좋겠어?.”
“모르겠어.”
“거울을 자주 봐.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알아야 귀여운지 예쁜지 알지.”
올리브영에서 아이라인을 고르는 제니 옆에 있어 주었다. 아이섀도도 권했다. 제니는 속눈썹을 들여다봤고, 그것도 바구니에 넣어줬다. 틴트, 네일 아트…. 바구니에 물건들을 담으며 제니의 눈물 자국이 조금씩 옅어졌다. 울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사는 제니, 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느라 저 고생인가 싶었다. 줄넘기, 헤어 클리닉, 핸드크림, 다이어트 차. 줄넘기까지 바구니를 가득 채워 결제했다.
손가락을 걸어 마주 잡고, 달빛을 따라 걸었다.
보도블록에 하나씩 조명이 켜지는 것처럼 가로등이 거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애가 손을 흔든다. 제니가 멋쩍게 웃는다.
“혹시 쟤니? 귀엽다고 한 애?”
“넘겨짚지 좀 마. 내 타입 아냐.”
살짝 붉히는 제니의 뺨이 예뻤다.
언젠가는 제니의 연애를 지켜보는 날이 있지 않을까?
연애라고 하니 좀 예스러운 느낌이 나서 '남자 친구'로 바꿨다.
그래, 남자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이유 없이 웃어대는 사춘기의 전환점이 오기를 바라며. 살짝 내려온 제니의 앞머리를 귀 뒤로 끼워준다. 무던했다고 기억되던 나의 중학 시절에도 친구 관계로 마음 다치고, 울고 불고 했던 걸 기억한다. 처음이라 그럴 거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감정이니. 불안한 거다. 감정은 그때그때 소중하다. 나무라지 말자. 속으로 욕할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