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동문선, 2004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1977)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1915년~1980년)의 사랑에 대한 단상집이다. 프랑스에서만 2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로 괴테의 <젊음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담화를 다각도로 정리하였다. 이외에도 <향연>(플라톤), <겨울나그네, 방앗간의 아가씨> (슈베르트), <어린이 정경 etc>(슈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M. 프루스트) <펠레아스와 멜리쟝드>(메테를링크),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셰익스피어)등이 상호 텍스트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사랑의 담론에서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상호 텍스트성 독서의 결과다. 책의 구성은 사랑의 담론의 파편들을 (문형)이라 부르며 하나의 기호처럼 기억된다고 말한다. 각 문형의 서두에 적힌 말은 그것의 정의가 아니라 논지라고 밝히고 있다. (16~17쪽)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즉, 텍스트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텍스트는 둘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문학적 텍스트의 의미와 해석은 어떤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개별적인 텍스트들 및 일반적인 문학적 규약과 관습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모든 텍스트는 인 용구들의 모자이크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사랑의 단상 』에 사용된 상호 텍스트의 모자이크를 통해 텍스트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형되는가에 초점을 두어 읽어보고자 한다.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표현이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정념을 과연 글로 옮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사랑은 수많은 아름다운 담론을 탄생케 한다”라고 말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은 존재하는 것으로 글로 옮길 수 있고, 글로 옮김으로써 불멸의 작품을 만든다는 입장이다. 베르테르는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베르테르는 로테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고, 그린다면 그녀의 실루엣 정도라며 표현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144쪽) 그렇다면 베르테르는 사랑의 감정을 재현할 수 없으며 정념은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일까? 만약 베르테르가 소망대로 로테를 그린다면 어떤 그림일까? 바르트는 사랑을 말로 표현한다면 외형만이 아니라 본질까지 표현해야 하는데 이게 과연 가능할지를 묻는다. 바르트는 외형과 본질을 동시에 충족하는 형식에 가장 근접한 것의 예로 하이쿠를 들었다. 하이쿠는 5·7·5조의 음으로 이루어진 일본 고유의 짧은 정형시다.
“이 여름 아침, 만은 화창한 날씨 //등나무 꽃을 꺾기 위해 // 밖으로 나가네” 또는
“이 여름 아침 만은 화창한 날씨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네”(145쪽)
하이쿠는 동어반복일 뿐, 글이 아니다. 하이쿠는 무수한 의미가 있지만 어떤 의미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렇듯 동어반복이며 제자리를 맴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상태를 반복해서 드러내긴 하지만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이쿠는 글이 아니다. 그렇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어떻게 글로 쓸 것인가? 이에 대해 바르트는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148쪽)라고 말한다.
사랑에 빠진 자, 사라지고 싶다. 사랑에 빠지면 일상에서와는 다른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 그 사랑으로 기쁨을 느낀다면 용해되어 사리고 싶어 진다는 것이다. 용해된다는 것, 사라지고 싶다는 것은 곧 '죽고 싶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 자살 충동은 '행위'가 없는 자살 충동이다. ‘부드러운 사라짐’이다.
“빠져들어 가는 것 절망, 또는 충족감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라짐의 충동.
나는 분해되는 게 아니라 용해된다. 넘어지고, 가라앉고, 녹여진다. 나를 잠시 스쳐 만져 봤던 이 상념은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다. 그것은 엄숙한 것이라곤 전혀 없는 정확히 말해 부드러움이란 것이다.” (25~26쪽)
『 좁은문 』은 제롬과 그의 외사촌 누이 알리사의 금욕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앙드레 지드의 작품이 다. 알리사의 사랑은 소유의 사랑을 넘어 천상의 사랑으로 가고자 한다. 그래서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그 감정을 억누른다. 지상에서의 사랑은 ‘조금 덜 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고 끊임없이 흐르려는 사랑, 그래서 조금 덜 사랑하는 하는 것이다.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 56쪽)
“어느 힘들었던 저녁 파티 후, x는 세르쉬미디 거리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잘 짜인 문장과 또렷한 목소리로 자기도 때로는 기절하기(사라지기)를 바란 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결코 마음대로 사라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58쪽)
사랑의 주체는 자신의 약함을 강한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게 된다. 사랑하면 순종하고 싶어 지고 긍정하게 되는 약한 부분은 사실 ‘부드러움’이다. 약함을 강함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주체는 고통을 껴안아 자신의 순진성을 지키며 사랑의 주체는 긍정성을 갖는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위해 남겨 놓은 오렌지를 로테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때 다른 사람은 베르테르에게 무엇일까? 그 사람을 나만 혼자 독점할 수 없다는 것, 그 사람을 세상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현실을 견딜 수 없고 그래서 세상을 질투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세상에 갑자기 귀찮은 것, 싫은 것, 없어졌으면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모든 것들이 나와 그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고 끊어 놓으려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페이딩’을 논지로 시작하는 장에서 질투의 멀어짐과 죽음의 멀어짐은 ‘나는 사라져 간다’에서의 멀어짐과는 다르다. 차라리 질투의 지옥을 택하게 되는 이유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멀어짐으로부터 지키기 위 해서이다.
“그 사람이 점점 멀어져 갈 때, 희미해질 때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 자기에게로만 속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럴 때 나의 마음을 찢어진다. 점점 멀어져 가는 병중의 할머니를 봐야 하는 마르셀처럼…” (162쪽)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앞에 있지만 더 이상 있지 않다. 할머니는 마르셀의 눈앞에 있지만 더 이상 마르셀을 사랑하지 못한다. 마르셀은 할머니로부터 버려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없을 때,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욕망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별은 다르다. 살아있지만 이미지는 죽은 상태로 죽음처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주체는 기꺼이 고통을 껴안아 자신의 순진성을 지키며 끊임없이 방랑하고 몽상하고 광기를 가진 존재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주체는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약함의 발견과 긍정의 힘으로 사랑의 주체가 된다. 사랑의 주체는 말하고 얘기한 사랑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