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베른하르트 슐링크, 도서출판 이레, 2004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법학자이다. 1995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발표하였고 독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39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독일어권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2008년에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소설은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다.
암울한 시대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며 독자에게도 묻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하지만 이 작품이 2차 세계대전이나 홀로코스트의 관점에서 크게 주목할만한 사건과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주인공 한나는 직접적인 책임자라기보다는 조력자의 역할을 했다. 한나는 유태인 강제수용소의 감시자였다. 수감자들이 있었던 교회에 불이 나 많은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교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그 죄로 그녀는 종신형을 받는다. 모범수로 수형 생활을 하던 한나는 조기 출소하는 날 새벽 자살한다. 그녀를 사랑했던 사춘기 소년 미하엘도 중년이 되어 한나가 유서로 남긴 마지막 일을 하며 이 책을 저술한다.
한나는 문맹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자전적 소설 『문맹』의 시작을 이렇게 한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표현이다. 이 책의 주인공 한나에게 ‘읽기’는 무엇이었을까? 한나와 미하엘의 만남에는 ‘책 읽고, 샤워하고 사랑하고, 잠시 누워있기’라는 일종의 의식이 있다. 그들이 함께한 ‘책 읽기’의 의미. 감추려는 비밀과 모른 척하려는 배반의 심리, 그 질병과도 같은 ‘책 읽기’를 비로소 시작했을 때 자살을 선택한 한나. 1부에서 3부로 구성된 소설을 통해 한나의 서재, 미하엘의 서재, 다시 한나의 서재로 ‘책 읽기의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사춘기 소년 미하엘과 한나의 첫 만남은 간염으로 허약해진 미하엘이 구토를 했을 때다. 한나는 열다섯 소년 미하엘의 얼굴을 닦아주고 토사물을 치우고 안아준다. 고통과 무안한 순간에도 한나의 감촉과 “향수 냄새, 땀 냄새 그리고 그녀가 일터에서 묻혀온 전차 냄새”(36쪽)를 좋아하게 된 미하엘은 육감과 성숙의 길로 빠져든다. 이 강렬함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에는 특별한 의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샤워하기, 책 읽어주기, 사랑하기, 그리고 나서 잠시 누워있기가 그것이다.
그 시절 한나의 침대에서는 어떤 책들이 있었을까? 어린 미하엘이 읽어 준 책들은 오디세이와 카틸리나 탄핵, 에밀리아 갈로티, 간계한 사랑, 노인과 바다 등의 우리도 알만한 고전들이 섞여 있다. 그들의 사랑에서는 책 읽어주기가 필수조건이었다. 부활절에 그들은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문맹을 숨기고 있는 한나의 불안과 공포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지만 자전거 여행 후에 미하엘의 집에 한나를 초대한다. 그때, 한나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들의 등을 문지르며 걸어가는 장면이 묘사된다. 한나와 서재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사방의 벽면을 빼곡이 채운 서가들 위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더니 한 서가로 다가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가슴 높이로 들고 천천히 책들의 등을 문지르면서 걸어갔다. (...) 그녀는 온방을 그렇게 걸어 다녔다. 이윽고 창문가에 멈추어 서더니 캄캄한 어둠 속을, 유리창에 비친 서가의 모습과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던 한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읽을 수 없는 책들의 등을 문지르며 온 방을 걸어다니다 마침내 어둠속에서 응시한 자신의 얼굴. 그녀에게 서재는 무엇일까? 분리된 다른 차원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미하엘이 묘사하는 한나의 모습은 오디세이에 나오는 하얀 팔의 순결한 나우시카의 모습을 연상하기도 하고, 건강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틀어 올린 머리 아래의 목덜미와 넓은 등, 건강한 팔뚝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노동은 생계와 결부되어 있다. 책은 그녀에게 다른 차원으로 느껴지는 배경일 뿐이다.
그후 승진기회를 얻게된 한나는 어이없게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고 만다. 문맹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미하엘은 자신이 한나를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에 빠진다.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수영장에 찾아왔을 때 모른 척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 한나의 문맹에 대한 수치심은 사회적 감정일까?
두 사람이 재회하게 된 것은 7~8년 후 법정에서였다. 강제수용소 여자 감시원이었던 한나가 가스실 해당자 선별 작업과 폭격에 의해 여성 수감자들이 있었던 교회가 불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두 명의 모녀만이 생존하고 모두 불에 타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법학도였던 미하엘은 이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한나는 법정에서 도도하게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반박하며 끈질기게 대응했다. 하지만 한나는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발언을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유죄를 확인하기 위한 재판장의 질문에 대해 “재판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119) “우리는 달리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135) 그녀가 생각한 자신의 책임은 수감자들의 죽음에 대한 것일 뿐 진정한 의미의 책임 가능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을 했는지는 알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인식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결정짓게 될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까지 거짓으로 인정해버리고 만다. 그녀가 문맹임을 알고 있던 미하엘은 이 문제로 아버지와의 면담을 요청한다.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였던 칸트와 헤겔을 쓴 철학자와의 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 나는 아버지의 두 서재를 기억한다. 한나가 책들의 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지나간 첫 번째 서재(...) 두 번째 서재의 창문들은 도로와 주택들 쪽에 나 있었고(...) 아버지의 서재는 책과 종이들, 그리고 파이프 담배 연기와 시가 담배 연기가 바깥세상과는 다른 나름대로 힘의 장을 만들어 놓은 밀폐된 공간이었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었다.”(151)
한나의 재판과 관련한 아버지의 대답은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153) “네가 서술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서 어쩌다 생긴 것이거나 유전적인 것이라면 너는 당연히 행동해야 한다.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한다. 물론 최종결정은 본인한테 맡겨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해.(...)”(155) “너를 도와주지 못해 유감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네가 도움을 청한 철학자로서 하는 말이다. 아버지로서 말하자면 자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 정말 가슴이 아프구나.”(156)
아버지와의 면담이 끝난 후 미하엘은 말한다.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가 시인한 보고서 작성은 문맹인이 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사실을 법정에서 말했더라면 분명 죄가 경감되었을 것도 알았다. 그녀가 그렇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바로 수치심 때문이라는 걸 간파했고, 재판장에게 말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침묵한다. 이 침묵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을 던진다. 미하엘이 침묵한 이유도 수치심 때문이었을까?
한나가 수감 된 후, 미하엘은 법제사 연구원이 된다. 한나의 사건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나가 수감 된 지 8년 뒤부터 출감될 때까지 10년 동안 다시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목소리를 들려주는 낭독의 과정은 과거의 사랑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의 틀을 만든다. 낭독하고 녹음하여 그녀에게 보낸다. 15세에 읽어주었던 오디세이, 체호프의 단편들과 슈니츨러 켈러와 폰타네, 하이네와 모리케, 카프카, 프리쉬, 바흐만, 렌츠등의 작가들의 작품을 낭독하고 녹음했다. 그러나 새로운 ‘책 읽어주기의 의식’은 한나를 변화로 이끈다.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198)
한나가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이다.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는 것과 함께 읽기와 쓰기를 배웠던 것. 미하엘은 한나가 문자를 깨우치는 의미를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199)
문맹을 탈출하자마자 한나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홀로코스트 실상을 증언하는 피해자 아베리 레비 등의 글과 가해자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글 등을 읽기 시작했다. 한나는 말한다.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하고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어. 재판을 받기 전에는 나는 그들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쫓아버릴 수 있었어.”(210) 글을 읽고 쓰지 못했을 때와는 달라진 것이다. 이제 죽은 수감자들이 자신에게 나타나도 그들을 쫓아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한나가 문맹으로부터의 탈출한 것은 자기만의 갇힌 세계로부터의 탈출로 이끌었고 비로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되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게 된 변화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질문이다.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이 소설을 읽고 ‘책 읽기’와 책을 읽는 장소인 서재에서 생각하기를 시작한 이유는 문맹의 수치심에서 죄의식과 양심으로 가게 되는 과정에서 발견한 진정한 리터러시의 의미이다. 양상은 다르지만 이 시대에도 한층 다양하게 한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