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만난 생각,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어크로스, 2021
철학자 제이컵은 “질문을 산다.” 고 했다.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69)
그러니까 질문을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품고 살아내는 거라는 얘기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는다고. 질문과 대답은 언제나 세트상품으로 생각하고 있던 내게 이 말은 볼륨이 점점 낮아지는 노래처럼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질 문 을 산 다?
“나는 충분히 성공하질 못했어”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그래,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
제니퍼는 “왜 성공하고 싶어?” 라거나 “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한 건데?”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나는 우리가 뉴저지에 있는 제니퍼의 발코니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 곁을 맴돌던 모기한테 그랬듯 그 질문을 찰싹 때리고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다들 그렇지 않니? 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하냐고? 지금 나보다 더. (70~71)
이 글은 저자가 친구 제니퍼와 나눈 대화이다.
제니퍼에게 ‘성공’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제니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되물었다.
저자는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강타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성공을 늘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는데, 제니퍼는 미적 측면으로 본 것이다.
성공의 모습. 어떤 모습이 그려지는가.
나는 과연 제니퍼처럼 입속에 넣고 굴려 먹는 알사탕처럼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질문을 사는 것’은 사고의 틀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야 할 텐데, 핑계를 대자면 우리 문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빠른 시간에 정답을 선택해야 하는 구조로 공부해왔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그렇다. 질문하면 바로 대답이 나와야 직성이 풀린다. 머뭇거리거나 꾸물대면, “그건 모르는 거야. 다시 공부해!”라고 말하지 않던가.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만약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와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요?”라고 물었다면 몇 가지 사진을 보여줄지 모르겠다. 검은색 터틀 스웨터를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라던지, 테슬라와 일론 머스크, 노벨상 수상자의 모습, BTS, 혹은 그 아이의 장래 희망에 맞는 인물을 찾아 보여줄 것 같다. 그러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없다. 꼬리는 잘리거나 숨긴다.
질문은 단순하게, 대답은 더욱 단순하게. 정답이 목표다. 빠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질문에 대한 문화라고 하면 지나칠까.
이 글을 읽으며 질문에 대해 곧바로 대답하기를 요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천천히 음미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음미해 볼 시간을 주면, 제니퍼와 같은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쉽게 무시해버릴 수 없는 질문 말이다.
질문은 어떤 모습이야?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