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본질로 돌아가는 길. 거기에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
[심오재일기 ⑤] 2025.10.26.
집으로 가는 길 1
여름과 가을 사이 긴 우기가 있더니, 계절은 어느새 가을로 넘어왔다. 무더위와 빗줄기로 멈추었던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그 사이 나무들은 녹음을 옅게 하고, 벌써 무수한 잎을 떨구고 있었다. 나무들에게도 내면으로의 귀환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여름볕에 질세라 큰소리로 자기를 내세우며 광합성하던 잎들의 소리가 잦아지자, 군데군데 가을꽃들이 피었다. 꽃들은 어느덧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면서도, 흔들림 없이 제 모양과 빛깔과 향기를 내보인다. 아니, 내보인다기보다 그저 거기 존재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다만 바라보는 내가 그것을 보인다고 느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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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계절의 소요 속에
고요히 피어나
자기다운 빛깔과 향기를 드러내고 있다.
믿음은 빛깔로
사랑은 향기로 피어나
진실 가운데 머문다.
머물러 피어나는 이 자리는
걸어온 길의 증거이자
다시 시작하는 숨터
이 터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어온 길,
이제는 돌아와 머무는
깊은 중심으로부터
맑은 숨결이 잔잔히 피어오르고 있다.
— 자작시 「가을꽃」 전문
가을꽃은 먼 길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의 숨결이다. 밖의 길에서 돌아와 안의 길로 들어서는 발걸음이다.
그들은 크고 요란한 빛을 띠지 않는다. 그 빛은 고요한 은둔자의 불빛처럼 작고 소박하며 은은하다. 그들은 자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고독 속에서 한 잎 한 잎 불을 밝히고, 한 송이 한 송이 세계를 넓혀 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다음의 진실한 한 걸음일 뿐, 전체 세계의 지도가 아니다.
나는 산책길에서 만난 가을꽃들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그 깊고 고요한 울림에 귀 기울인다.
꽃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긴 길을 돌아왔는지, 봄날의 존재 없음과 여름날의 폭풍우와 불볕의 시련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닥쳐올 겨울의 죽음에 대해서도 미리 염려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답게 정제된 빛과 깊이 모를 향기로 그 모든 사연을 대신할 뿐.
이제는 집에 머무르는 계절이다. 떨켜를 형성해 잎을 떨구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처럼, 사람도 계절이 차면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귀환은 세상을 거부하거나 삶의 여정을 끊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부름에 응답하는, 안으로의 긴 여정의 시작이다.
집에 머무른다는 것은 지붕과 벽 안으로 숨는 일이 아니라, 깊이를 요구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일이다. 오래 떠돌던 도시의 소음과 온 힘을 다했으나 부서지던 관계들, 형식적인 대화와 끊임없는 역할극은 어느 순간 문득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반면 방의 고요는 나를 가라앉히고, 깊은 안도 속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그 고요는 정신이 다시 눈을 뜨고 있음을 알려주는 은밀한 징표다. 자신을 듣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일깨운다.
집은 정직한 대면의 장소다. 그곳에서는 어떤 연기도 불가능하다. 그곳에서 나는 관객 없이 ‘역할’ 뒤의 자아를 마주한다. 이것은 퇴각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와 고독과 침묵을 선택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문을 열어젖히는 일과 같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안에 깊고 넓은 세계를 지니고 있으며, 고독은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그 안에서 비로소 삶의 핵심을 묻는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 질문이야말로 귀환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첫 발걸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주는가.
문학과 영성, 심리치료의 공부가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긴 준비였음을 문득 깨닫는다.
“바깥을 보는 자는 꿈꾸고, 안을 들여다보는 자는 깨어난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꿈꾸고, 그 꿈속에서 배우고 일하고 갈등하며 나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이제는 집으로 돌아와 고요히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그곳에서 나는 진짜 나를 쓰기 위해 멈칫거리고, 골똘히 사유하며, 들어주고 적어달라고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가끔은 세상과 통하는 창을 열어 오래 머문 공기를 내보내고, 신선한 바람과 햇빛을 들인다.
돌아온다는 것은 큰 변화가 아니라 작은 숨 하나를 제자리에서 고르는 일일지 모른다.
오늘 나는 그 숨을 찾아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다시 시작되는 내 깊은 숨결을 듣는다.
♤ 오딜롱 르동, 「감은 눈 」, 1890.
– 닫은 문과 감은 눈 안에서 깊어지는 내면의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