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오케스트라

by 혜윰의 해밀

“삶은 혼자 완성되지 않고, 언제나 어떤 화음 속에서 비로소 울린다.”


[심오재일기 ⑦] 2025.11.29.

인생 오케스트라


가치 있는 무엇인가에 헌신할 때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 가치는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신앙이나 학문의 추구일 수도, 직업적 성공이나 금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가장 지고한 가치는 예술이다.


연주회를 찾는 일은 건조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이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색색의 빛으로 물들인다. 바이올린과 첼로, 비올라, 오보에와 플루트, 팀파니와 큰북—각 악기는 저마다의 숨결로 누리를 채색하는 단풍잎처럼 삶과 세상을 부드럽게 물들인다.


이 아름다운 화음을 위해 연주자들은 얼마나 긴 시간을 고요히 견뎌냈을까. 그러나 그 애씀은 결국 그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고 주변에도 그 빛을 전파한다. 악기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한 길을 꾸준히 연습하고 끝내 좋은 결에 도달하려는 모든 노력은 삶을 연주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딸도 그렇게 자기 삶을 연주하고 있었다.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시민오케스트라 연습에 참여했고, 연주회가 끝난 뒤 말했다.

“엄마 덕분이에요. 정말 행복해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게 해준 것이 큰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1998년 6월, 아이엠에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남편이 다니던 은행이 하루저녁에 문을 닫고, 퇴직금 대신 받은 위로금은 고작 천만 원 남짓이었다. 그중 절반으로 딸의 바이올린을 샀다. 우리 형편으로는 무리였고, 남편은 허영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나머지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바이올린은 남았다. 그리고 2024년 11월, 딸이 그 악기를 연주하며 안겨준 기쁨은 그때의 선택을 몇십 배의 이윤으로 되돌려주었다.


딸이 무대에서 자기의 악기를 연주하듯, 나도 자판을 두드리며 나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른다. 남편이 퇴출된 바로 그 시기, 나는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의 삶은 조용히 열리곤 한다. 그때의 선택과 방향들이 세월을 지나 지금의 우리가 된 것이다.


그 무렵 방황하던 큰딸은 어느새 상담심리사로서 브런치 멤버십 운영 작가가 되었다. 그때 피아노를 치던 손이 지금은 날마다 자판을 두드리며 글이라는 자기만의 음악을 세상의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다.


음악은 혼자 마음속에서 아무리 완벽히 울려도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희미해진다. 또, 뛰어난 연주자라도 오케스트라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소리는 고립될 뿐이다. 사람 역시 혼자 아무리 좋은 마음을 품고 있어도 관계 속에서 어울릴 줄 모르면 진정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전체의 화음을 위해 속도와 크기를 맞추어야 하고, 때로는 제 소리를 죽일 줄도 알아야 하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남들이 내는 음을 오래 귀 기울이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날 연주회에서 큰북 소리가 유난히 새롭게 들렸다. 모든 악기가 흐르고 있는 시간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정확한 한 순간에 울리던 큰 소리— 그것은 착한 거인의 발자국처럼 모두의 마음을 안도하게 하는 마침표였다.


공동체의 어울림 속에서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퍼져나간다. 삶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 맡은 음을 내면서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고, 어울리며 하나의 연주를 완성해 가는 존재인지 모른다.


2025년 12월, 작은딸이 다시 서는 무대의 프로그램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에서 문이 열리고, 멘델스존의 협주곡에서 한 사람의 음이 빛나고, 교향곡 7번에서 다시 모두의 걸음으로 이어지는 흐름—


이 순서가 어쩐지 작은딸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어릴 적 무리해서 사 주었던 그 바이올린이 세월의 시간을 건너 이제는 오케스트라의 한 자리에서 다른 악기들과 어깨를 맞대고 울리고 있다.


삶도 음악처럼 자기 음을 찾아가는 시간이 있고, 서로의 결을 맞추며 어울리는 시간이 있는 것 같다. 그 하모니 속에서 우리 모두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 에드가 드가,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1870.

– 무대의 중심이 아닌 자리에서, 각자의 음으로 전체의 시간을 떠받치는 사람들.

월,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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