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의 색, 나의 빛깔

by 혜윰의 해밀

"비는 꽃의 색을 씻어내지 않고, 오히려 숨겨 두었던 빛깔을 한 겹 더 깊게 불러낸다."


[심오재일기 ⑨] 2024.7.17

수국의 색, 나의 빛깔

임미옥


낮부터 드문드문 내리던 비가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시원스럽게 내리긋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산을 펴고 집 밖으로 나선다.


장대비가 내리는 뜨락에 서 본다.


비를 맞으면 식물들은 제 빛깔을 더 짙게 드러낸다. 햇살 아래선 밝게만 빛나던 것들이 빗속에서는 음영이 깊어지고, 그 깊어진 음영 속에서야 비로소 본래의 색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꼬리조팝꽃의 분홍빛은 더욱 산뜻하고 온화해지고, 무성한 목수국 이파리의 초록빛은 암녹색 비취옥처럼 반짝인다. 그 사이 송알송알 맺힌 꽃봉오리들의 연둣빛도 한층 또렷하다. 곧 그 봉오리들이 열리면, 흰빛의 목수국꽃이 피어날 것이다.


검은 우산을 쓰고 뜰을 서성이며, 빗줄기 속에서 더욱 싱싱해지는 식물들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한다. 사람도 비를 맞을 때 더욱 선명해지는 걸까. 장대비의 내리침 속에서 자기 안의 무언가가 한층 또렷하게 살아나는 걸까.


음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환한 해의 조명 아래 화사하게 빛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인생의 장대비가 몰아칠 때 그 비 아래 잠시 서 보라. 그제서야 감추어 두었던 나의 음영이 드러나고, 내 존재의 빛깔은 더욱 선명해지리라.


뜰에 무성한 이파리 사이, 송알송알 맺힌 목수국 봉오리들을 본다. 처음엔 라임빛 연둣빛이었다가 점차 크림색에서 연분홍, 진홍빛으로 물들고, 가을이 되면 단풍처럼 붉어지다가 청동빛으로 바뀌어 겨울까지 남는다. 비록 마른 꽃이지만 그 송이마다 하나의 작품 같다. 한겨울, 그 위에 소복이 눈이 내려앉으면 면사포를 쓴 청동신부상처럼 보인다.


목수국은 일반 수국이 다 지고 난 뒤에야 자신의 꽃을 피운다. 그래서 허전한 화단에 가을까지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 꽃은 중성화와 양성화가 한 화서에 어우러지고, 꽃잎과 꽃받침잎은 모양이 비슷해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다.


개량 수국은 꽃 전체가 장식꽃, 즉 헛꽃으로 이루어져 있어 화려하고 탐스럽지만 향기가 없다. 수분이 불가능해 꺾꽂이로만 번식한다. 반면 산수국은 중심에 진짜 꽃을 품고 있어 향기가 나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열매도 맺는다.


수국은 토양의 성질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산성 토양에선 푸른빛을, 중성으로 갈수록 보라, 자주, 분홍빛을 띤다. 고유한 자기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자리의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꽃.


생각해본다. 꽃도 환경이 편안해야 핑크빛 모드가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냉정한 푸른빛으로 얼어붙는 것이 아닐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햇살보다 장맛비 속에서 더 빛을 드러내는 수국처럼, 우리도 때때로 비를 맞아야 제 색을 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산수국일까, 목수국일까. 돌아보면, 헛꽃만 잔뜩 피워 몸피만 늘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글에서도, 삶에서도.


며칠 전, 문인회 선배님들과 점심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속에서 한 선배님의 수국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젊은 시절, 마곡사 해행당 객실에 머무르던 여름. 앞마당에 핀 보랏빛 수국이 빗줄기 속에서 유달리 짙게 빛났다. 인생의 전환점에 있던 선배님은 그 절에서 만난 연상의 비구니와 며칠간 함께 지낸 일이 있었다.


여승은 성격이 까다롭고 말이 없어 처음엔 함께 있는 게 꽤 힘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오후. 물이 불은 계곡가 바위에 그 비구니가 홀로 앉아 목 놓아 울고 있는 모습을 선배님은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연을 물은 적은 없었다. 묻는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거두게 되었다.


“그 젊은 여성이 출가한 내막에 어찌 기막힌 사연이 없었겠니.”

선배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같은 시절, 같은 절, 같은 여름.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길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출가라는 길을 걸었다. 비에 젖은 절마당의 수국은 그 두 삶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인사동 거리 찻집을 나서다가 만개한 수국 앞에 섰다. 누군가 사진을 찍자고 했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저마다 다른 수국빛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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