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잎 점
임미옥
초등학교 하교길
사직공원 언덕에 무성하던
아카시아 나뭇잎
잎 가지 하나 따서
점을 치곤 했었지.
엄마가 집에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잎 한 장에 안심과 공허가 교차하던
그 시간들,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있을까.
여자가 집을 지켜야 便安하다던 시절
엄마는 왜 자꾸 집을 비우셨을까.
변소가 불편한 꿈을 꾸다
깨어나 문득 떠오른 생각—
그 무심한 점괘, 지금도 유효할까.
‘있다’가 나올 때까지
자꾸만 따고 또 따서 치던
어린 위안의 기도.
✍️ 시인의 노트 ― 「아카시아 잎 점」을 쓰며
꿈에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끝내 볼일을 보지 못했다. 더럽고 불편한 공간, 아무리 자세를 바꿔도 해결되지 않는 막힘. 깨어나자 오래전 기억 하나가 또렷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사직공원 언덕을 내려오며 아카시아잎으로 점을 치던 나. “엄마가 집에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그 단조로운 되뇌임 속에, 나는 불안을 질서로 바꾸려는 아이였다. 잎 한 장이 나의 기도였다.
그때의 어린 나는 엄마의 부재를 견디기 위해, ‘있다’가 나올 때까지 잎을 뜯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점은 예언이 아니라 기도였다는 것을. 내가 딸들에게 물려준 건 불안이 아니라, 어쩌면 그 기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夢에서 깨어나 떠오른 그 문장, “여자가 집에 있으면 便安하다”의 便과 安은 단지 편안함의 뜻이 아니었다. 더럽고 불편한 현실을 정화하고 막힌 길을 통하게 하는 갱생의 언어였다. 몸의 便이 곧 마음의 便이자, 영혼의 귀환이었다.
이 시는 그 오래된 기도가 다시 말을 건 순간의 기록이다. 꿈이 문을 열고, 잎 하나가 다시 내 앞에 떨어지며, 나는 그 아이의 손끝을 붙잡았다. 이번엔 잎 대신 글로, 한 장 한 장 천천히 떼어내듯 썼다.
♤ 클로드 모네, 「정원 속의 여인(Woman in the Garden)」, 1872, 파리 오르세 미술관
▷ 잎사귀 사이로 번지는 초록의 떨림은 ‘아카시아잎 점’의 손끝 진동을 닮았다. 숨결처럼 흔들리는 빛 속에서, 불안과 위안이 한몸으로 섞여 있다.
어릴 적 나는 엄마가 이런 정원에 머물러 주기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