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by 혜윰의 해밀

"눈길은 지나간 계절이 아니라, 내가 내 이름으로 끝까지 걸어온 삶의 방식이다."


[심오재일기 ⑮] 2021.1.7.

눈길


내 젊은 시절엔 눈이 정말 푸지게 내리곤 했다. 한번 내리면 몇 날을 이어 내렸고, 그렇게 쌓인 눈에 발목이 빠지는 일은 예사였다. 지금처럼 제설작업이 잘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삼한사온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던 겨울은 추울 때는 뼈가 시리도록 몹시 추웠다. 강설은 쉬이 녹지 않았고, 복숭아뼈나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이 흔했다.


그 깊은 눈길을 나는 퍽 많이도 걸었다. 승용차가 귀했고 대중교통도 그리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찬 기후 속에서 눈길을 걷다 보면 내 정신이 은화처럼, 아니 얼음처럼 맑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살 터울의 오빠가 사춘기에 들어서 반항하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오빠의 친구집들을 탐문했다. 그때 엄마는 속상한 티를 감추려고 그랬는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셨고, 나는 얇은 겨울 스웨터 차림이었다. 엄마의 초조한 기분과 몸을 파고드는 추위 때문에 내 몸은 저절로 움추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겨울 베짱이 같았는지, 그때부터 나에겐 '베짱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따라붙었다. 별명 짓기 좋아하는 아버지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겨울의 눈길을 떠올리면 저절로 몸이 움추러든다.


젊은 날, 함께 눈길을 걸으며 문학을 얘기하고 인생을 논하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시리도록 하얗던 눈의 시간들은 언제 다 녹아 버렸을까.


돌아보면 내 인생의 전환기에는 늘 눈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눈길에는 동행이 있었다. 나는 눈길을 걸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모색했고, 그 곁에는 언제나 나의 고민을 함께 견뎌주는 이들이 있었다.


여고 시절 마지막 겨울방학의 어느 눈 오는 아침, 눈 쌓인 담양 관방제림 팽나무길을 함께 걸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던 친구 제연이 있었다. 졸업식날, 눈 쌓인 교정 밖의 길을 차마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곁에 있어준 친구 향숙이도 있었다. 해질 무렵까지 광주 시내의 눈길을 함께 걸어 주신 음악선생님도 기억난다.


졸업 후 이듬해 겨울날,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친구 숙의 시골집. 길이 엇갈려 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옛이야기 속 노인처럼 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봉서를 쓰시던 할아버지, 쪽진 하얀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두터운 솜버선에 흰 고무신을 신은 채, 눈 쌓인 밭둑길을 하염없이 걸어 어린 손녀의 친구인 나를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친구는 다음날 우리 집으로 찾아왔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온종일 광주 시내 눈길을 걸었다. 저녁 무렵 지쳐 들어간 양림동의 어느 다과점. 아무도 없는 난롯가에 단둘이 앉아 바라보던 텔레비전, 뽀얀 수증기를 올리던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긴 대화를 나누던 숙. 그날의 찻집을 나는 잊지 못한다. 우리는 당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마더 데레사의 삶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가를 두고.


5·18이 있던 해의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다. 우리는 그 눈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했다. 그는 그 눈길을 계속 걸어 자신이 잃어버린 고향 북청과 만주까지 함께 가고 싶다고 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꿈꾸듯 북청과 만주의 벌판을 그려보곤 했다. 그렇게 원없이 퍼붓고 끝없이 이어지는 눈길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기약했고, 몇 번의 눈길을 더 걷다가 웨딩 마치를 울렸다. 르동의 정물화가 찍힌 커다란 액자를 들고, 서울에서 광주 집 앞까지 눈길을 걸어 찾아왔던 그 새벽이 결혼을 결심하게 한 결정적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눈길은 이후 딸들의 양육과 학생들의 논술 지도를 하는 길로, 나의 문학 창작과 가톨릭 영성상담심리학, 그리고 문학치료학을 공부하는 길로 이어졌다. 그 길들 위에도 눈은 축복이나 예감처럼 내려 쌓였고, 그 곁에는 가족과 스승들, 문우와 교우, 학우들이 함께 있었다.


어느 눈 내리는 저녁, 교우이자 학우인 몇 사람과 박 신부님을 모시고 둘러앉아 나누던 이야기들은 밤늦게까지 함박눈처럼 쌓여 갔다. 천국에 대한 기대를 가슴에 안고, 그 눈길 위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던 밤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 모든 눈길 끝에 지금의 내가 있다. 돌아보면 함부로 찍은 것 같았던 발자국들이 여기에까지 이어져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묻던 철없는 시절의 발자국을 지나, 나는 지금까지 나대로의 발자국을 찍으며 여기까지 왔다. 와서 보니 나는 엄마이자 문인, 상담치료자가 되어 있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눈길을 내 발로 걸어온 이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임미옥 마리아. 나만의 길을.


요즘엔 눈이 예전처럼 많이 내리지 않는 것 같다. 또 함박눈이 내려 쌓여도 그 눈길을 걸을 일도 없고, 함께 걸을 친구도 없다. 혼자서 눈길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옛날의 기분을 다시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도 나는 혼자 눈길을 걷는다. 눈길 속으로 산책을 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먼 길을 가 창작 수업을 한다.


요즘 내 눈길의 친구는 글쓰기 참여자들과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런 노래들이다.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하얀 산길을 헤매이고 싶소

​외로운 겨울새 소리 멀리서 들려오면

내 공상에 파문이 일어 갈 길을 잊어버리오

가슴에 새겨보리라 순결한 임의 목소리

바람결에 실려 오는가 흰 눈 되어 온다오

​저 멀리 숲 사이로 내 마음 달려가나

아 겨울새 보이지 않고 흰 여운만 남아 있다오

눈 감고 들어보리라 끝없는 임의 노래여

나 어느새 흰 눈 되어 산길을 걸어간다오

– 김효근, 「눈」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면, 나는 이 눈길을 조금 더 나아갈 것이다. 죽는 날까지, 내 발로 내 이름의 발자국을 찍으며.

♤ 담양 관방제림, 겨울 눈길

– 함께 걷던 발자국이 사라진 뒤에도, 길은 여전히 나를 앞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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