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펠로의 화살과 노래

― SNS 시대, 공감 수 없는 글쓰기의 의미

by 혜윰의 해밀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

― SNS 시대, 공감 수 없는 글쓰기의 의미


“글쓰기는 목적은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그리고 오늘도 다시, 조용히 한 문장을 쓴다.

그 말은, 어디엔가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나는 화살 한 발을 공중에 쏘았네,

땅으로 떨어졌지만, 어디인지 알지 못했네.

너무도 빠르게 날아가

내 눈은 그 궤적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나는 노래 한 숨결을 허공에 내쉬었네,

땅으로 떨어졌지만, 어디인지 알지 못했네.

누가 그토록 예리하고 강한 눈을 가졌기에,

노래의 비행을 따라갈 수 있으랴?


오래 오래 지난 뒤에, 한 그루 참나무 안에서

나는 그 화살을 발견했네. 부러지지 않은 채로 있는.

그리고 그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마음 속에 들어 있었네.


– 「The Arrow and the Song」,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1807–1882) / 한글 번역: 임미옥


1. 글을 쓴다는 것의 고독


나는 매일 페이스북에 다양한 글을 써 올린다. 페이스북 사용 초기부터 꾸준히 써온 일상 속 자아 탐색 기록인 심오재 일기, 오래 전부터 한 편의 시가 조용히 건네온 말을 받아적어온 시적 동행, 최근 스스로 기획해 연재 중인 시와 시인의 노트,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인문 사유 에세이 등, 모두 내 삶과 사유의 결을 기록하고자 하는 작은 시도들이다.


그런데 그 글들은 대체로 공감 수가 적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게 된다. “이렇게 열심히 써서 올리는데, 왜 이리 조용하지?” 공감 수는 열두어 개 남짓, 많아야 스무 개 내외, 댓글은 한두 개. 성의 없는 반응보다 더 차가운 침묵 앞에,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왜 여기에 글을 써서 올릴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기대하며, 왜 이 조용한 광장에 내 마음의 문장을 던지는 걸까?


2. 글은 왜 쉽게 퍼지지 않는 걸까 – 침묵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다


나는 가끔 되묻는다. 왜 이렇게 정성껏 쓴 글이 쉽게 퍼지지 않는 걸까?

무언가 부족했던 걸까, 혹은 시대에 맞지 않는 방식인 걸까?


SNS에는 빠르고 가벼운 말들이 넘친다. 자극적인 언어, 선명한 편가름, 혹은 재치있는 웃음과 감동의 패턴들. 내 글은 그 흐름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걸 안다. 그것들은 대체로 생각을 멈추게 하는 대신, 멈춰 생각하게 하는 말들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방식의 말도 여전히 필요한 시대라고 믿고 싶다. 금세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해도, 가만히 오래 남아 천천히 스며드는 말. 그런 말은 언젠가 다른 결을 가진 독자에게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믿는다. 때론 한 사람의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이미 닿아 있었을지 모른다고.


3.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 부적절감과 자기 의심의 문턱에서


SNS에 글을 올리면, 나도 모르게 반응을 의식하게 된다. 무시하고 싶지만, 어느 순간 점점 더 민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정성 들여 올린 글에 반응이 적은 날이면, 어쩐지 허탈하다.


어느 순간, 나도 생각하게 된다.

조금만 시류에 맞춰볼까? 요즘 사람들 감정선에 맞는 방식으로?

가볍게, 즉흥적으로, 반응이 보장되는 글을 써볼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접는다. 나는 한 편의 글을 위해 내 삶을 투여한다. 마음의 굴곡을 오래 들여다보고, 표현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며, 읽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그런데도 반응은 미미하다. 반면 어떤 글들은 마치 흘려 쓴 메모 같지만 폭발적인 공감과 댓글을 끌어낸다. 그럴 때 나는 이곳에서 나만 이질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다시 느낀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오늘은 본격적으로 생각해본다. SNS 시대, 공감 수 없는 글쓰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정말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4. 좋은 글은 왜 ‘느리게’ 퍼질 수밖에 없는가


나는 처음 SNS 글쓰기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다. 글이란 종이책에 활자화해야 권위와 가치가 선다고 믿었다. 하지만 문학 서적이 독자와 점점 멀어지는 시대에 활자 책만 고집하는 것도 답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것은 아예 닿을 길 자체를 막는 것 같기도 해서다. 시집 혹은 문학서적과 독자의 거리는 마치 팬데믹 시대의 명동길 같다. 길은 여전히 있으되, 인적이 드물다.


반면 SNS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시장이다. 독자와 만나고 닿을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아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내 글은 마치 노점의 야채처럼 거들떠보는 이가 드물다. 나름 정성껏 가꾸고 다듬어 내놓아도, 브랜드와 유행에 밀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아주 가끔씩이라도 둘러보고 한 묶음씩 구입해주는 이가 있으니 아예 인적 없는 곳보다는 낫다고 할까.


좋은 글은 원래 느리게 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선동하지 않기 때문에, 당장의 ‘좋아요’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공감 수 적은 내 글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발터 벤야민은 진짜 감응은 기다림을 요구한다고 말했고, 파스칼 키냐르는 말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고 했다. 그 침묵을 견딘 말만이 결국 도달한다.


사유의 글은 본래 ‘반응’보다 ‘잔상’을 남긴다. 마음을 흔들기보다, 오래 잠들었던 무언가를 일깨운다. 진심 어린 글은 늦게, 그러나 깊게 도달한다.


SNS는 빠른 것들에 유리하고, 글쓰기는 느린 도달을 감수하는 윤리다. 그러니 애당초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왜 아직도 여기에서 글을 쓰는가?


먼저 익숙함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종의 편익에의 의존성 때문이다. 이곳은 쓰고 읽기에 편하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이 많다.


나는 십 년 전쯤 처음 카카오스토리에 짧은 단상들을 적었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원하는 독자가 없었다. 나는 시선 등을 쓰면서 항상 진정한 독자를 원했고, 그 원함이 나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많은 공감 수를 원하는가, 한 사람의 진정한 독자를 원하는가.


5. 글은 숫자가 아닌 사람에게 가닿는 일


롤랑 바르트는 말했다. “텍스트는 그가 원하는 독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단지,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이 문장은 롱펠로의 시와 닮아 있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는 화살과 노래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시 발견되듯, 글 또한 숫자가 아닌 사람에게 닿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문장은 나를 위한 말이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도달한 것이다.


6. 글쓰기의 윤리 – 돌아오는 침묵을 견디는 내면의 태도


내가 여기에 글을 써 올리는 데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는 정체성의 구성이며, 사람들 앞에 그것을 내어놓는 것은 내 존재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폴 리쾨르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서사함으로써 정체성을 구성한다. 글쓰기는 자기 존재의 윤리적 형식이다.


한나 아렌트는 덧붙인다. 말하기는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타자 앞에 나아가는 행위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공감 수가 적든 많든, 독자가 몇이든, 내가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나의 문장을 쓴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말이자, 나를 더 깊고 넓게 만들어가는 내면의 응답이다. 글은 결국, 나를 만든다.


7. 말과 글쓰기, 사라지지만 남는 것에 대하여


롱펠로의 시에서 그가 쏜 화살은 아프게 뱉은 말과도 같고, 내쉰 숨결 같은 노래는 생명과 사랑이 담긴 시와도 같다. 화살도, 노래도, 일단 우리의 입을 통해 세상에 나가면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져버리지만, 결국 훗날 참나무에서, 친구의 심장 깊은 곳에서, 상처 혹은 위로의 형상으로 다시 발견된다. 전자는 날카로운 말의 흔적으로 남고, 후자는 따뜻한 노래의 여운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말의 힘’과 ‘글쓰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서 흘러나간 언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가슴에 박히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깃든다.


결론 – 반응을 넘어서 말하고 기록해야 할 이유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노래를 부르고 화살을 쏘는 일이다. 가볍게 뱉은 말 한마디, 진심 담긴 글 한 줄이 얼마나 멀리, 오래 남을 수 있는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글쓰기는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응답은 언젠가 반드시 온다는 믿음. 그리고 오늘도 다시, 조용히 한 문장을 쓴다. 그 말은, 어디엔가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오늘도 하루치의 신선 식품을 뒤로 하고, 밤새 길어난 사유의 채소를 따서 조용히 새벽 장터에 내어놓는다. 혹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향해 한 숨결의 노래와 사유의 화살 한 발을 쏘아올린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 글 앞에 조용히 멈추어 서기를 기다리며.

이미지

글처럼 자라난 채소,

기다림처럼 놓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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