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판단 없는 글쓰기다

– 기도와 글쓰기, 말이 되지 않는 언어의 자리에서

by 혜윰의 해밀

기도는 판단 없는 글쓰기다

– 기도와 글쓰기, 말이 되지 않는 언어의 자리에서

(2025. 8. 1.)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

– 시편 42편 1절


“나는 지금 믿고 있습니다. 아니, 믿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로시 데이의 이 고백은,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자리를 통과한 말의 형상이다. 그것은 말보다 먼저 일어나는 탄식이며, 생각보다 먼저 흔들리는 신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문장으로 도달하지 못한 언어, 곧 기도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기도는 형식을 갖춘 문장이기 이전에, 내 안의 무의식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처음으로 표면에 떠오르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기도를 종교적 행위로만 여길지 모르지만, 기도는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언어다. 인간이 언어를 갖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의 떨림이자 응답의 몸짓이다.


칼 융(Carl Jung)은 말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당신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는 무의식을 억누르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어 올리고 환대하는 방식으로 의식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글쓰기는 바로 그런 환대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완전한 문장보다 먼저,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감각에서 시작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실된 말이며, 가장 가난하지만 가장 강한 문장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기도했다.

“주여, 보소서. 이 빈 그릇을 채워주소서.”


그는 자신을 ‘줄 수 없는 자’, ‘받기만 하는 자’로 고백했다.

기도란 채우기 위한 말이 아니라, 비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빈 자리에서, 언어는 튀어나온다.


기도와 글쓰기는 이처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완벽한 문장을 쓰려고 애쓰는 대신, 말이 되지 않지만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내는 용기.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도달하기 위한 말.


기도는 실패해도 된다.

글쓰기도 실패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진짜 말’을 찾는 일이다.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말했다.

“삶 전체가 기도가 될 수 있다.”


삶이 기도가 된다면, 글은 그 삶을 따라 적는 응답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기도처럼 글을 쓰고, 글처럼 기도할 수 있다. 그때 문장은 삶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통과하며 길어 올린 진실의 언어가 된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쓰는 이 한 줄의 글이, 기도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 기도시 –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까지


주여,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정을 찾고 싶은데 찾아지지 않아 괴롭습니다.


흔들림 없이 당신 앞에 서고 싶은데

내가 끝없이 흔들려

당신의 모습이 흔들립니다.


제 마음은 속히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싶은데

조급함이 불신을 낳습니다.

제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고

스스로 작고 약함을 인정하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당신께 기대게 하시고

당신께 기대어 깊어지게 하소서.

주여, 이 허약한 나무를

당신을 닮은 나무로 자라게 하소서.

♤ 에릭 엔스트롬, 『은혜(Grace)』, 1918, 미네소타 역사협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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