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후회할 줄 아는 용기

by 혜윰의 해밀

[심오재일기] 2025.2.21.

젊음은 후회할 줄 아는 용기


대통령 탄핵사태 이후 어느새 두 달 반 가량이 지났다. 꽁꽁 얼어붙었던 날씨가 조금씩 풀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동백꽃 소식을 들었다. 그 사이 나는 온통 정국에만 매달려 관련 글을 읽고 쓰는 데 시간을 쏟았다. 시대를 읽는 일에 몰두하는 동안, 내 얼굴은 다른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전에는 없던 미간 가로 주름이 깊게 패여 있다. 작은 글씨를 오래 들여다보느라 눈을 찌푸리고, 심각한 문장을 따라가느라 이마에 힘을 주던 시간이 그대로 남았다. 읽기의 흔적이, 몰입의 자국이 얼굴에 그어진 셈이다.


이마 주변 머리카락엔 하얗게 눈이 내려 쌓였고, 눈가와 미간엔 얕은 골이 졌다. 큰딸은 볼 때마다 인상을 좀 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름은 그저 노화라기보다, 내가 지나온 문장들의 자취처럼 느껴진다.


염색할 생각도 없고, 날이 조금 풀렸다고 겨울옷을 벗을 마음도 없었다. 아직은 무장 해제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계절이 완전히 돌아서기 전까지는 겹겹이 싸매고 버티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밖을 나왔더니 나무엔 벌써 물이 오르고 있었다. 가볍고 산뜻한 재질과 빛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대개 나보다 젊은 이들이다. 우리 창작반의 한 회원도 밝은 분홍빛 자켓을 입고 나타났다. 하지만 찬바람이 스미자 그는 곧 괜히 얇게 입었다며 웃었다. 성급했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 얇은 자켓이 부러웠다. 찬 기운을 각오하고도 먼저 봄을 입어보는 마음이. 돌아와 옷장 문을 열어보니, 오래전 입던 엷은 빛의 블라우스와 스프링 코트가 아직 걸려 있다. 젊은 날의 나는 이맘때쯤 그것들을 꺼내 입곤 했다. 멋내다가 얼어죽는다는 말을 귓가로 흘려보내면서도, 먼저 한 계절을 앞질러 가보던 때였다.


나이가 들수록 조심이 많아진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태도가 어느새 몸에 배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한다. 젊음이란 어쩌면 후회할 일을 저지를 용기, 그리고 그 후회를 감당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함께 지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모처럼 황사가 걷힌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고층아파트의 하얀 측벽이 그 아래 서 있다. 평소엔 눈길 주지 않던 벽. 문도 창도 없이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그 벽이 오늘은 다르게 보인다.


한 건물 측벽에 누군가 작은 창을 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원제: Medianeras(측벽))》이라는 영화에 나온 장면이었다. 빛이 처음으로 스며들던 순간, 그 벽은 더 이상 측면이 아니었을 것이다. 측벽도 빛이 스미고 누군가의 시선이 닿으면 앞벽이 된다. 측벽과 측벽이 서로를 마주 보면 따스한 숨이 닿는 자리로 돌아선다.


나는 아직 겨울옷을 벗지 못했지만, 나무에는 이미 물이 오른다. 주름이 깊어졌다고 해서 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늦게, 조금 더 확인한 뒤에 움직일 뿐이다.


새삼 젊음이 부러워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남은 젊음은, 후회를 만들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한 번 선택한 일의 의미를 끝까지 감당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봄을 향해 걸어 나아간 하루였다.

♤ 《Medianeras》(2011)

– 측벽에 난 작은 창 하나가 방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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